나는 내가 떡잎마을 아이라고 생각했다.

 

포켓몬스터 애니메이션 무인편이나 적녹청 게임에 대한 각별한 감상은 없다고 생각했다.

아빠가 사주신 DVD로 처음 포켓몬 애니메이션을 '정주행'했을 땐 무인편이 지나가자마자 AG에 꽂혀서 무인편 같은 건 바로 잊어버렸었고, 적녹청은 내 세대와 기기 자체가 한참 떨어져있어서 파이어레드로만 경험했었다. 파이어레드는… 일곱섬에서 막힌 채로 카트리지를 잃어버렸다. (이건 좀 다른 주제의 이야기라서 짧게만 이야기지만, 그 시절의 나는 정말 물건 등을 잘 잃어버렸다.)

 

다만 관동지방에서 기억에 남는 것이 없는 건 아니다.

나인테일은 관동지방 포켓몬이다. 범용 아이디로 쓰고 있는 lacoco4의 lacoco는 무인편 232화에 등장한 나인테일의 이름을 잘못 받아적은 스펠링이다. 그리고 고스트, 에스퍼 포켓몬이랑 초련을 좋아하게 된 것도 무인편 노랑시티편을 보고서부터였다.

 

그래도 애니메이션에 관한 한 나는 호연지방 사람에 더 가까웠고… 반짝이는 눈으로 하루카의 콘테스트를 보고 나서 DVD를 껐더니 포켓몬스터 디아루가·펄기아 정발 광고를 하고 있었다.

그런 게임이 나온다는 것은 북미 포켓몬 공식 사이트나 잡지 등 기타 매체를 통해 알고 있기는 했다. (나는 포켓몬코리아보다 포켓몬 닷컴을 먼저 접했다.) 마그마번이랑 에레키블, 로즈레이드같은 못생긴 진화형들이 나온다는 인상이었다. 특히 그때의 나는 슈우의 로젤리아를 사랑했던 만큼 로즈레이드에 대한 불만이 몹시 컸다.

그런데 먼 나라 이야기였을 땐 불만만 있었는데, 우리나라 TV 광고로 보니까 이게 진짜 발매되는 게임이라는 실감이 났다. 나는 닌텐독스의 팬이었다. 닌텐도 게임으로 즐기는 포켓몬이라니, 기대가 컸다. 마그마번, 에레키블, 로즈레이드의 못생김 같은 건 바로 잊어버렸다. 

다음 주말, 바로 할머니와 함께 신세계 백화점으로 달려갔지만 아직 발매되지 않았다는 답이 돌아왔다.

얼마 후에 다시 신세계를 방문했고, 내 손 안에는 내 첫 포켓몬 카트리지, 〈포켓몬스터 디아루가〉가 들어왔다.

 

바로 플레이를 시작했다. 그때의 나는… 설명서를 읽지 않고 닥돌했더니 리포트 쓰는 방법을 몰라서 강석까지 깨놓고서 한번 리셋했다. 그리고 팽도리를 골랐고 (처음엔 불꽃숭이를 골랐던 것 같기도 한데, 기억이 안 난다.) 강석과 배틀했고 유채와 배틀했고, 유채와의 배틀에서 로즈레이드의 매지컬리프를 맞고 패배한 뒤 못생겼다고 생각했던 로즈레이드의 강함에 반해서 꼬몽울을 잡았고, 사천왕 오엽까지 깨고 나서야 세레비넷에서 로젤리아는 돌진화라는 걸 알게 되어서 난천과 배틀하기 전에 드디어 염원하던 로즈레이드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또… 포켓몬코리아를 알게 되었고 2차 포켓몬 배포 이벤트 이후 대부분의 배포 이벤트에 참여했으며…… 뭐 이런 이야기를 하고자 했던 건 아니니까 이쯤에서 줄인다.

 

아무튼 내 '어린 시절'에 발매되었던 게임은 포켓몬스터 DP였고, 내가 제일 좋아했던 애니메이션 시리즈는 AG였으며, 더빙판이 방영중이어서 학교 아이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곤 했던 시리즈도 역시 DP였다. 애들은 구시대적 히로인인 이슬이를 싫어했고 봄이에게는 관심이 없었으며 털털한 성격의 빛나를 좋아했고, 봄이를 가장 사랑하고 이슬이를 아꼈던 나는 반발심리로 빛나를 싫어했다. 팽도리는 빛나의 포켓몬이어서 싫어한 건 아니고 그냥 짜증나서 싫어했다.

 

왠지 DP에 대한 추억을 늘어놓는 것처럼 되었는데 사실 그러려고 쓰는 글은 아니다.

하고 싶었던 말은, 내가 떡잎마을에서 나고 자란 아이라는 것이다.

원래 태어날지 말지 같은 건 스스로 결정하는 게 아니고, 태어날 시대도 출신지도 마음대로 고를 수 없는 법이다.

마그마번이 잘생겼든 못생겼든, 빛나가 좋건 싫건, 2000년에 태어난 나는 자의와 상관없이 떡잎마을 출신이다.

 


 

 

이 우주에서 태어난 인간이란 무릇 자신의 근본을 찾아 우주의 기원을 궁금해하기 마련이다. 물리적으로 태어난 곳이 근본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서울 토박이도 근본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성지순례 가기도 한다. 북미에서 태어나 북미에서 자란 오타쿠가 근본을 찾아 아키하바라로 가기도 하고.

 

내 생각에는, 그래서 포켓몬 월드에서 태어난 사람은 언젠가 관동지방에 끌리게 되는 것 같다.

관동지방으로 돌아가고 싶어지고, 관동지방을 더 잘 알고 싶어진다.

타지리 사토시가, 슈도 타케시가 궁금해진다. 지금까지도 밝혀지지 않은 뮤의 비밀, 포켓몬스터 환상의 최종화 플롯 같은 것에 어쩐지 삶의 진리가 나타나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을 울린 범프 오브 치킨의 〈아카시아〉 PV(통칭 '갓챠')는 아이들이 선로 위를 걷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적녹청에서 주인공의 방에 있는 TV로 감상할 수 있는〈스탠 바이 미〉는 무인편 포케애니 시리즈 구성 담당인 슈도 타케시가 최초에 시리즈를 구상할 때 참고한 작품이기도 하다.

편애라고 아무리 지적받아도 관동지방 포켓몬의 강화폼이나 1세대 게임이나 영화의 리메이크가 계속해서 나오는 것도, 어쩌면 포켓몬에 깊게 관여하는 사람일수록 관동의 부름 같은 것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3년 전 극장판 포켓몬스터〈너로 정했다!〉에 빠졌고, 최근 슈도 타케시의 포켓몬스터 관련 칼럼을 일독하고서 2년 전 조금 하다 말았던 렛츠고 이브이의 플레이를 다시 시작했다.

간만에 렛츠고를 켰더니, 주인공이 마티스의 사인을 가지고 있었다. 이 '마티스의 사인', 분명히 울트라 썬문의 주인공 방에 있었던 물건이었다. 조금 진행했더니 갈색시티 항구에서 말리화를 만날 수 있었다.

 

고향이, 가장 소중한 추억의 장소가, 가장 격렬한 모험의 장소가 신오지방이든 알로라지방이든 상관없다. 포켓몬스터의 세계에 남아있는 한, 언젠가는 관동지방으로 향하게 될 것이다. 그쯤되면 충분히 블루시티의 동굴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그곳에서 뮤츠를 만나서, 나는 무언가 알게 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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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션 링크]

 

(이 문서는 2020년 4월 30일에 작성되었습니다.)

 

<포켓몬스터 다이아몬드/펄: ‘수수께끼의 장소’와 환상의 포켓몬 아르세우스>

 

2006년 10월 24일, 포켓몬스터 공식은 같은 해 9월에 발매된 <포켓몬스터 다이아몬드/펄> 게임내 버그에 대한 공지를 올렸다. 공식 사이트에 기재된 ‘벽에 갇혀서 게임을 진행할 수 없게 되는 버그’를 유발하는 트리거는 두가지였다.

  • 유니온 룸 내부에서 닌텐도 ds의 전원이 꺼진 이후 포켓몬센터 2층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타는 것
  • 첫번째 사천왕의 방에서 벽을 향해 파도타기를 쓰는 것 [1]

사흘 뒤, 10월 27일부터 전국의 DS스테이션에서 버그 ‘수복’ 프로그램(버그 패치가 아닌, 세이브 데이터 내 플레이어의 위치를 집앞으로 바꿔주는 프로그램이었다.)이 배포되었으며 [2], 초기판 품절 이후 재발매된 소프트웨어에서는 해당 버그들이 발생하지 않게 수정되었다.

 

그러나 포켓몬스터 다이아몬드/펄의 발매로부터 한 달도 안 되는 시간 사이에, 유저들은 두번째 버그 - 일명 ‘사천왕 파도타기 버그’ - 를 통해 환상의 포켓몬 다크라이와 쉐이미를 잡는 방법을 알아냈다.

포켓몬센터 에스컬레이터 버그와 사천왕 파도타기 버그는 플레이어를 통상의 맵이 아닌 ‘벽’으로 밀어낸다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후자의 경우, 벽을 뚫은 후 맵 바깥의 검은 공간에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특징이 있었다.

이 검은 공간을 탐험하다 보면, ‘수수께끼의 장소’라는 맵 이름이 뜨거나, 그외 신오지방의 다른 맵의 이름이 뜨거나 bgm이 흐르는 등의 현상이 일어났다. 그리고 마침내 플레이어들은 ‘수수께끼의 장소’를 통해 실제 신오지방에 해당하는 좌표로 이동한 뒤 ’탐험세트’를 이용하면, 실제 신오지방의 그 장소에 도착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세이브 데이터를 손상시킬 수 있다는 치명적인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방식으로 ‘신월섬’과 ‘꽃의 낙원’으로 이동해 다크라이와 쉐이미를 잡을 수 있다는 발견은 수많은 플레이어를 열광시켰다.

수수께끼의 장소를 통한 신월섬 및 꽃의 낙원으로의 이동 루트를 처음으로 발견한 유저는 알 수 없으나, 몇개의 블로그 포스트와 위키위키의 수정 히스토리를 통해 이러한 루트가 2006년 10월 24일 이전에 이미 발견되었음을 알 수 있다. [3]

 

그렇다면 아르세우스도 수수께끼의 장소를 통해 잡을 수 있을까?

 

아르세우스와 다크라이 및 쉐이미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한가지 있었다. 맵에 이미 존재하고 있으며, 배포 아이템은 플레이어를 그 위치까지 도달할 수 있게 해줄 뿐인 신월섬과 꽃의 낙원과 달리 아르세우스는 플레이어가 창기둥에서 천계의 피리를 사용하지 않는한 게임에 나타나지 않는다. 다크라이와 쉐이미는 플레이어를 기다리고 있을 뿐인 반면, 아르세우스는 소환해야 하는 것이다. 수수께끼의 장소를 통해 시작의 방에 도달하더라도, 천계의 피리가 없으면 아르세우스는 소환할 수 없었다.

그로부터 10년 이상의 세월이 흘러, 2017년이 되었다. 그 사이에 수수께끼의 공간에 들어갈 수 있는 새로운 방법들 - ‘비틀기Tweaking’ - 이 연구되었으며, 맵 이름이 ‘수수께끼의 공간’이 아닌 검은 공간을 포함하는 ‘공허Void’라는 용어가 새로이 정립되었다.

‘비틀기’와 ‘공허’를 명명하고 연구하기 위해 포럼 커뮤니티, The Hall of Origins가 집결하기도 했고, 그 HoO가 최종적으로는 모든 포켓몬 게임의 버그를 다루는 포럼 겸 위키위키 커뮤니티 Glitch City Laboratory와 합쳐지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는 등, 많은 사건이 있었다.[4]

Ganix(구 닉네임 Cyro)와 RETIRE를 비롯한 HoO 출신의 버그 연구가들이 공허를 통해 아르세우스를 조우하는 방법을 알아낸 것은 2017년 1월이었다.

그들은 2017년 1월 10일, 공허를 통해 펄파크에 해당하는 맵에 입장하는 것으로 플레이어의 메뉴를 통상의 메뉴에서 펄파크 모드의 메뉴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요는 메뉴의 ‘가방’과 ‘리포트’가 사라지고, 대신 맨 위의 선택지가 ‘포기한다’로 바뀐다는 것이다. ‘포기한다’의 기능은 플레이어가 존재하는 맵의 네 번째 스크립트를 실행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펄파크의 네번째 스크립트는 ‘포기하시겠습니까?’라는 대사를 출력하는 것이다. (공허를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시작의 방의 경우, 네 번째 스크립트는 아르세우스와의 조우다. [5]

이후 GCL 소속 버그 연구가들의 거듭된 노력으로, 2020년 현재 공허를 통해 아르세우스를 잡는 최단 루트는 5분 내외 수준으로 최적화되었다. [6]

 

4세대 포켓몬스터 게임 속 아르세우스

 

버그 수정으로 ‘수수께끼의 장소’가 봉쇄된 포켓몬스터 플라티나에서 배포된 다크라이를 잡을 수 있게 하는 ‘멤버스카드’, 셰이미를 잡을 수 있게 하는 ‘오박사의 편지’와 다르게, 아르세우스를 소환하는 아이템인 ‘천계의 피리’는 Pt 한정으로조차 끝내 한 번도 배포되지 않았다.

이후 2013년, 포켓몬스터 XY의 발매를 기념하여 이루어진 닌텐도 월드 리포트와의 인터뷰에서 마스다 준이치 디렉터는 천계의 피리를 배포하지 않은 이유를 해명했다.

 

"I thought it would be confusing for people and kind of hard to understand how it worked. So I eventually made the decision not to distribute it."

 

공개된 이유는 “플레이어들에게 혼란스러울 수 있고, 사용법을 알기 어려워서”였다.[7] 무슨 혼란을 말하는 것일까? 아이템의 사용법에 대한 혼란? 아이템 배포의 형평성에 대한 혼란? 포켓몬 세계관에 대한 혼란?

한편, 아르세우스라는 포켓몬은 결국 배포되었다. 4세대 내에서 단 한 번, <아르세우스: 초극의 시공으로> 영화 특전으로.

극장에서 배포된 아르세우스는 포켓몬스터 플라티나와 포켓몬스터 하트골드/소울실버로 데려가면 각각 게임 내에서 관련된 이벤트를 볼 수 있다. 포켓몬스터 플라티나의 경우, 무쇠탄갱에서 등산가 차림을 한 ‘철학가’와 만나 포켓몬과 세계와 마음에 대한 그의 견해를 들을 수 있는 잔잔한 이벤트이다. 하트골드/소울실버에서는 ‘신도유적’이라는 새로운 맵에서 화려한 컷신을 포함한 이벤트를 체험할 수 있게 된다.

버그로 잡은 아르세우스라고 하더라도 ‘신도유적’ 이벤트를 감상할 수 있으며[8], 레벨을 100까지 올리면 포켓무버와 포켓몬 뱅크로 7세대까지 이동이 가능했다. [9]

이후 포켓무버에 적용된 버전 업데이트 패치로 인해, ‘수수께끼의 장소’에서 잡은 아르세우스는 6세대 이상으로 이동시킬 수 없게 되었다. [10]

 

 

각주

[1] https://www.nintendo.co.jp/ds/adaj/info/index.html

[2] https://n-styles.com/main/archives/2006/10/29-030000.php

[3] http://pokejun-monhan.cocolog-nifty.com/blog/2006/10/post_2fd8.html

[4] 2020년 9월부로 Glitch City Laboratories가 아카이브를 남기고 폐쇄되었다.

[5] https://glitchcity.wiki/Retire_glitch

[6] https://youtu.be/eszoM2RHqsU

[7] https://www.nintendoworldreport.com/interview/35513/pokemon-x-and-y-interview-with-game-freak

[8] https://blog.naver.com/14239/221644928711

[9] https://blog.naver.com/14239/220934345288

[10] https://blog.naver.com/rh_ab1203/2211977077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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