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숲에 쳐들어왔을 때 헤라크로스와 비퀸은 싸웠다. 소미안과 에몽가는 더 깊은 숲속으로 숨었고 브이젤은 물 속 깊이 잠수했다. 조로아크는 두꺼운 나무 기둥 뒤에서 처음 보는 인간들이 둥그런 도구로 동료들을 잡아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인간이 꺼낸 불꽃 포켓몬은 거대하고 튼튼해서 꼭 전투를 위해 만들어진 기계 같았다. 인간의 손에 키워진 포켓몬은 늘 숲속에서는 상상도 못할 만큼 강하다. 그 힘을 탐내어 스스로 인간을 따라나서는 포켓몬도 있었다. 그러나 조로아크는 싸우기를 좋아하는 포켓몬이 아니었다.

커다란 괴수가 숲을 불태우고 동료들의 가냘픈 목을 물어뜯는 모습을 바라보면서도, 조로아크는 나서지 않았다. 고향이 없어져도 조로아크는 순응했다. 조로아크는 그런 포켓몬이었다.

 

이 목숨이 다하는 한이 있더라도 나와 숲의 명예는 포기할 수 없다, 예전에 그리 말한 동료가 있었다.

그래서 한 줌의 재가 된 로젤리아를 조로아크는 기억했다.

작은 들꽃을 꺾어 화관을 만들어주곤 했던 로젤리아를 떠올릴 때마다, 조로아크는 생각했다.

그렇게 되지 말아야지. 무엇을 포기하게 되더라도 나는 살아야지.

 

 

언어

처음에는 나무 기둥 뒤에 숨어서 트레이너들의 대화를 엿듣는 것에서부터 시작했다.

포켓몬.’ ‘배틀.’ ‘몸통박치기.’ ‘잡았다.’

조로아크는 성대를 가다듬었다.

그르르'는 어느새 호그앵몽'이 되었고 호그앵몽, 호그앵몽, 호그앵몽, 수백 번의 반복 끝에 보갱몽이 완성됐다. ‘보갱몽'이 완성되었을 때즈음엔 '', ‘'을 말할 수 있었다.

 

인간의 단어 중에서 가장 발음하기 쉬운 것은 미아였다.

그래서 조로아크는 그 단어가 마음에 들었다.

 

, , 미아.

 

그렇게 말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조로아크는 숲을 떠났다.

그리고 다시는 조로아크로 돌아오지 않았다.

 

 

인사

아주머니'는 인심이 좋은 사람이었다. 아주머니는 열정적으로 숲에서 온 미아의 보호자를 찾았지만, 인근 도시들의 포켓몬센터에 전단지를 붙이고 도로에 현수막을 붙여도 잃어버린 아이를 찾으러 오는 부모는 없었다. 그리하여 아주머니는 계획에 없던 아이를 키우게 되었다.

아주머니는 빵을 팔아 아이에게 책을 사 읽혔고 , , 미아'밖에 말하지 못하던 아이는 빠르게 말이 늘었다.

 

아주머니,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아이는 마을을 떠났다.

그리고 다시는 아이로 돌아오지 않았다.

 

 

통로

그는 집밖으로 잘 나가지 않는다. 목소리가 쉬어서 그르렁거리는 짐승 같다며 잘 말을 하지 않는다. 창백한 피부에다 건조한 입술은 거의 푸른 끼가 돈다. 퀭한 얼굴 한가운데에 형광의 눈빛은 어쩐지 이질적이다.

그는 어렸을 때 친구가 포켓몬에게 공격당하는 모습을 본 이후 트라우마에 시달렸다고 설명했다. 악몽을 꾸는 탓에 밤에 잠을 잘 자지 못하고, 음식도 먹는 족족 체하는 일이 많아 몸이 쇠약해졌다 한다. 몬스터볼을 보는 것만으로 어지럼증이 와서, 포켓몬센터는커녕 프렌들리숍 근처에도 못 간다고 한다. 포켓몬을 만날까 두려워 집밖을 잘 나가지 않는다고 하는 그에게, 그래도 햇빛과 바람을 쐬는 편이 좋다고 충고하는 좋은 이웃들이 있다.

그러나 겨우 지나가는 말에 그치는 염려. 그는 그런 이 동네 특유의 거리감을 좋아한다.

사람을 겨우 존재하게 하는, 사람을 거의 잊혀지게 두는.

 

트레이너는 배틀로 상금을 따고, 제빵사는 빵을 구워 팔듯이 그는 글을 쓴다.

그는 포켓몬에 관한 글을 쓴다.

 

커튼의 틈새 사이로 해질녘의 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테이블 위에는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홍차가 놓여 있다. 그는 편지를 뜯어보고 있다.

 

포켓몬을 그토록 두려워하면서 어째서 포켓몬에 대한 글을 쓰냐는 질문에는, 포켓몬이 두려운 존재가 아닌 세계를 상상하며 쓴다 대답한다.

직접 관찰하고 겪은 일처럼 생생하다는 감상에는, 말은 고맙지만 전부 공상 속의 이야기이며 현실의 자신은 몬스터볼조차 만질 수 없다고 답장한다.

 

당신의 글을 읽고 뇌문의 서쪽에 있는 특정한 숲을 떠올렸다는 익명의 트레이너의 편지에는, 곧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직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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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거워닝: 그루밍범죄를 연상시킬 수 있는 묘사

전편: https://thesunlightturnedharsh.tistory.com/5


 

기억 속의 그 미소는 여전히 시원스럽고, 반짝반짝하고, 아름답다.

 

배에서 내리자고 마음먹는 데에는 제법 시간이 걸렸다.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이런 이야기를 앞에서 꺼낼 수 있을까. 지난 일이다.

 

우리는 영화관에 나란히 앉아서 내가 등장하는 영화를 본 적이 있었다. 당신은 스크린 안의 나를 앞에 두고 살아 숨쉬는 나를 옆에 두고 있으면서도 어느 쪽도 보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배틀에서 패배해야 사랑에 가능성이 생기는 각본이었다. 역설적이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적이었다.

정말로 사랑에 빠지기 쉬운 순간은 상대방이 약점을 보인 그 순간이다.

아니면 내가 그런 인간이기 때문에 그와 같은 남자와 엮인 걸지도 모른다. 남의 약점을 파고들고, 누군가를 오롯이 손에 넣고 싶어 했다는 점에서 그와 나는 닮아있었다. 하지만 그는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을 준 적이 없었다.

형식상의 사과와 지킬 수 없는 약속, 변명 같은 이상을 늘어놓던 미려한 목소리가 귓전에 맴돈다.

변명이 많은 사람이었다.

 

미안합니다.’

만족시키세요.’

사람의 마음을 잘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당신과 있으면 이해하게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신뢰, 사랑, 그 모든 것을 부디 저에게 가르쳐 주시길. 변명도 많고 요구도 많은 사람이었다.

 

바꿀 수 없는 것은 바꾸지 않은 채로 두면 된다. 정직함이 최선이고 결핍은 잘못이 아니다. 자신이 아닌 무언가로 변화하려고 했던 것은 비극이었고 아크로마는 포켓몬을 변화시키고 합체시키고 분리시키는 기계를 계속해서 개발했으며 그것도 비극이었다. 그러나 가장 큰 비극은 아크로마가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은 일이었고 메이가 바로 신형 아크로마머신이었다.

 

당신이 말했었죠. 언제까지나 여기서 기다려 달라고. , 여기에 있겠습니다.

불을 끈 조종실에서 그가 속삭였다.

당신도 계속 내 곁에 있어줄 건가요? 메이, 당신이 필요해요.

그리고 키스 하나.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이상한가요?

그렇다고 말하지 못했다.

 

휴우에게 말할 수 없었다. 그 꽃은 다른 사람의 관심을 끌기 위한 것이었다고. 그런데 그 사람은 낯빛조차 변하지 않았다고. 속박하려 하지 않아도 언제나 곁에 있어줬던 사람은 너였다는 걸 이제는 안다고, 이제 와서 말할 수 없었다. 그래도 그 사람이 특별했다고 말하기에는 수치스러웠다.

 

국제경찰 핸섬이다. 네오 플라스마단에 과학자로서 가담했던 아크로마라는 남자를 찾고 있다.”

어느 날 신오에서 온 경찰이 말했다. 그는 플라스마단의 보스였어요. 그 죄목은 게치스에게 떠넘겼나 보네요. 주변의 여론을 조작할 수 있는 상대라면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는 게 아닐까요? 메이는 여러 가지를 생각했지만

못 잡을 거예요.”

한 번도 제 손에 들어온 적이 없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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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츠루는 언제나 원하는 것이 많았다.

그 애는 포켓몬을 잡아달라고 하지 않았다.

토우카짐에서 102번도로까지 가는 짧은 거리를 휘청거리면서 걷던 그 애는 비장한 표정으로 풀숲으로 걸어들어가면서 당신은 거기서 기다려달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아빠의 포치에나에게 기술을 명령하고 포치에나를 볼에 되돌리고 랄토스에게 빈 몬스터볼을 던지는 그 애의 위태로운 뒷모습을 몇 걸음 뒤에서 지켜봤다.

(한참 나중에야 물어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 왜 지켜봐달라고 한 거야?”

그 애는 씩 웃으면서, 욕심쟁이 같은 표정으로, “증인을 원했어요. 불쌍한 미츠루를 위해서 다른 누군가가 잡아다 준 포켓몬이 아니라고, 미츠루가 스스로 포켓몬을 잡았다고 말해줄 사람을요.”)

 

자신이 없어졌을 때 비로소 완성되는 화목함이 있다.

미츠루가 그것을 처음 느낀 것은 시게케타타운으로의 요양이 결정된 날이었다. ‘잘됐다, .’ 시원섭섭한 안타까움, 약간의 불안, 그리고 기묘한 안정감. 만약 시게케타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면, 분명, ‘참 좋은 애였는데. 항상 최선을 다하던 아이였죠.’ 모범적인 애도를 상상했다. 몇 번이고. 그리고 깨달았다.

애도는 필요없다.

오직 찬미할 명성을 남기고 싶었다.

그래서 미츠루는 인사 없이 떠났다. 그들은 안타까워할 것이고, 불안해할 것이고, 받아들일 것이며 안도할 것이다. 그러나 미츠루는 부정도 분노도 타협도 우울도 수용도 필요 없다. 그 모든 것을 바꾸기 위해서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가슴에 손을 얹은 미치루가 말했다.

그 애는 분명히 괜찮을 거예요.”

기묘하고 모범적인 화목함이 미치루와, 미치루의 남자친구, 미치루의 어머니(미츠루의 이모? 하루카는 사촌의 어머니는 이모인가 고민한다.), 미치루의 아버지를 감싸고 있었다.

어쩐지 그 말과는 다르게 미츠루는 이미 죽었다고 들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하루카는 도망치듯이 미치루의 집을 빠져나왔다.

하루카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림으로 그린 듯 반듯한 아이가 아니다.

무겁고, 축축한 떨리는 숨을 들이쉬고 내쉬던 소리, 조금 시큼한 침 냄새.

괜찮지 않아

생각보다 똑부러진 아이가 아니다 내 아차모 앞에서 조금도 힘을 못 쓰던 랄토스 한 마리가 옆에 있다고 괜찮을 리도 없다 지금도 그 애는 신호를 보내고 있잖아

 

거기서 지켜봐 주세요

 

내가 쓰러지는 그 순간까지

나를 잊지 말고

숨을 거두더라도

승자로서 기억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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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가 처음 자취를 감추었을 때, 그는 3일만에 상록시티 체육관 트레이너에게 발견되었다. 연락을 받자마 자 뛰쳐온 듯 헉헉거리며 동굴에 찾아온 그린에게, 레드는 체육관을 사유화하지 말라고 했다. 그린은 레드를 죽이 겠다고 했다. 그린의 등살에 못이겨 집으로 돌아간 레드는 영자의 우는 모습을 보았다. 

겨우 3일이었다. 그린은 태초마을에서 3일이면 장례 의식을 다 치룰 수 있을 시간이라고 했다. 장례 문화에 는 지방별로 차이가 있어서, 무지개시티나 노랑시티가 되면 하루만에 끝나기도 했다. 가장 길게 장례를 치루는 보 라시티의 장례식도 현대에 와서는 일주일을 넘기지는 않는 편이었다. 

하지만 살아있는 트레이너에게 있어서는 겨우 3일이었다. 레드가 석영리그 두 번째 챔피언이 되고서부터 그만두기까지의 시간도 딱 3일이었다. 일주일 동안 레드는 사천왕과 그린을 꺾고 챔피언이 되었고, 여러가지를 알게 되었고, 밤에 살짝 석영고원을 빠져나왔고, 아무도 찾지 못할 장소를 찾아 블루시티의 동굴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고, 그린에게 발견되었다. 

 

이수재는 소년을 기억했다. 

포켓몬과 합쳐진 자신을 구해준 것은 지나가던 트레이너 소년이었다. 포켓몬 마니아니, 포켓몬 전송 장치니 하며 자신을 소개하던 내내 소년은 입을 꾹 다문 채 과묵하게 있었다. 소년은 모자를 푹 눌러쓰고 몬스터볼을 쥐 었다 펼쳤다 하다가, 딱 한 마디—“나도 포켓몬을 좋아해.” 하고 중얼거렸다. 그때 이수재는 소년이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 어렴풋이 이해했던 것 같다.  

포켓몬을 데리고 고향을 떠나는 어린 아이들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포켓몬 리그에 꿈과 야망을 품는 아이 도 있고, 이 세상의 모든 포켓몬을 만나보고 세계의 진실을 파헤치고 싶어하는 아이도 있다. 그리고 어떤 아이들 은, 단지 고향에 머무르고 싶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모험을 떠나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모험을 떠난다. 

그런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자신이 주변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던 아이들이다. 어째서인지 주변의 인간들과 비슷하게 행동하려고 해도, 결코 그들 사이에 섞여들지 못했던 아이들이다. 그런 아이들은 나이가 차면,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세계를 찾아 떠난다. 

그런 세계가 존재하는지 어떤지, 이수재는 알지 못했다. 이수재는 떠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수재에게는 가족이 많았다. 가족은 점점 줄어가는 추세였지만, 이수재가 소년이었을 적에도 이수재만큼 가족이 많은 사람은 드물었다. 오박사에게 듣기로는, 먼 옛날에는 가족의 수가 더 많은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말하는 오박사도 손주가 두 명 있었다. 태초마을에서 세 명이면 큰 가정이었다.  

이수재에게는 할아버지와 어머니와 여동생이 있었다. 이수재 본인까지 해서 네 명이고, 세대로 말하자면 세 세대다. 이수재는 살면서 그런 대가족을 다른 곳에서는 본 적이 없었다. 커다란 편이 아닌 금빛시티의 집이 종종 사람들에게 우스갯소리로 ‘금빛시티 대저택’으로 불리는 이유였다. 

가족이 많으면 여행을 떠나기는 어렵다. 포켓몬센터에 갈 때마다 가족 구성원이 돌아가면서 걸어오는 연락 을 받고 있으면, 몸은 여행을 하고 있더라도 마음은 집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차피’ 라는 마음으로, 이수재는 소년 시절 구태여 모험을 시도해 보지도 않았다. 

대신, 이라고 할 수 있을만한 것은 아닐지라도, 이수재는 훗날 관동지방의 마을에서 벗어난 곳에 땅을 사서 이사했다. 

 

직업을 가진다는 것은 가족을 가진다는 것과 비슷한 일이다. 둘 다 있는 이수재의 경우, 모험을 떠나는 일따 위 이론상의 계획으로도 세울 수 없는 몸이다. 어차피 호전적이지 않은 성격의 자신은 동굴을 통과하다가 골뱃의 간식거리로 전락하지나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하긴 했다. 이수재는 정착의 운명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레드는 모험이 어울리는 아이였다. 

자신의 오두막에 찾아온 레드의 이야기를 듣고서, 이수재는 소리 높여 웃었다. 

니 진짜로 석영리그 챔피언을 할라 캤나? 

레드는 대답 없이 더 내려가지 않는 모자챙만 만지작거렸다.   

“... 알았다. 내가 오박사한테 니 살아있다고 전해줄께. 그라모 오박사가 지 손주랑 니 엄마한테 다 전해줄 끼라. 니는 가고 싶은 데 가서 살고 싶은 대로 살고, 가끔가다 포켓몬만 잡아다 박스로 보내라. 그렇게만 하모 내 다 알아서 얘기해줄께.”

 

레드의 박스는 텅텅 비어 있어서, 새로 들어오는 것은 바로 눈에 띄었다. 보낸 것은 알아서 놓아주든가 박사 에게 보내든가 해달라는 것이 레드의 요청이었다. 레드는 박스에 포켓몬을 쌓아두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오늘은 레드의 박스에 롱스톤이 들어왔다. 이수재는 새로 들어온 롱스톤을 오박사에게 보내며, 레드로부터 의 선물이라고 전했다. 

레드는 오늘도 살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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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트인 경기장 위로 밝은 빛이 눈부시게 쏟아진다.

파란 하늘이, 햇살이 펄럭이는 망토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진다.

역광을 받아 그늘진 얼굴, 그 가운데 두 눈이 금빛으로 반짝인다.

모래 먼지가 가라앉고, 승자의 여유로 단델은 몸의 한켠에서 조금 힘을 뺀다. 몸이 오른편으로 기울어지고, 오른손은 가볍게 주먹 쥐었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그 어떤 조명보다 더 높게 떠 있는 태양 향해 왼팔을 위로 뻗는다.

함성

세상을 가득

메운다.

단델은 빛에, 함성에, 세상에 삼켜진다.

땀 한줄기가 이마를 타고 내려오다가 속눈썹에 걸린다. 시린 눈을 살며시 감아보지만, 빛이 눈꺼풀을 관통한다.

그는 챔피언이다.

그는 정점이다.

이것이 세계의 전부이다.

그는 세계의 전부를 손안에 쥔 남자다.

단델은 쓰러질 듯한 현기증을 느낀다.

 


 

시합을 마치고 대기실로 돌아오면 아주 긴 꿈에서 깨어난 것 같다. 잠에서 막 깨어난 것처럼 눈꺼풀이 무거운 피로가 몰려온다.

높은 하늘 위를 나는 꿈을 꾸고 있었던 듯한 기분이다. 깨어난 지금은 겨우 두 다리로 성가시게 느껴지는 몸뚱이를 받치고 단단한 바닥 위에 서 있다.

"괜찮아 ~? 물 마실래?"

" ... ―어어."

멍하니 있던 단델이 한 박자 늦게 반응한다.

고개를 돌려보면 금랑이 조금 우쭐한 표정으로 생수병을 내밀고 있다. 누가 안 챙겨주면 쓰러지게 생겼다니까~. 목소리가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다.

고개를 젖히고 물을 들이켜자, 조금 정신이 돌아온다. 숨을 내뱉고, 반이 넘게 줄어든 병을 금랑에게 돌려주며 그제야 단델이 거친 목소리로 내뱉는다.

"고맙다, 금랑."

"하하. 천만에."

금랑이 가볍게 웃으며, 물기가 떨어지는 단델의 입술을 엄지로 쓱 닦는다.

단델의 아랫입술에 손가락 끝이 닿는 그 찰나, 어떤 질척한 감정이 금랑 안에서 소용돌이 친다. 손에 닿은 것을 잡아 뜯어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불에 덴 듯이 금랑이 손을 떼었다.

무능한 이 남자가 경멸스럽다. 이런 아둔한 사람에게 챔피언이라는 배역을 맡긴 가라르리그도 증오스럽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런 남자에게 패배해서 챔피언이 되지 못하는 자신이...  추하지만 익숙한 감정을 얼굴 뒤로 밀어 넣으며, 금랑은 대신 서글서글한 미소를 짓는다.

 


 

로즈는 석영리그에 가본 적이 있다고 했다.

석영리그에서 진정한 포켓몬의 힘을, 트레이너의 권위를 보았노라 했다.

그가 석영리그에서 느낀 것은 경외심, 그리고 공포였다.

그는 석영리그의 사천왕이 포켓몬과 트레이너가 도달해야만 하는 최후의 목적지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그는 가라르에 포켓몬 리그를 세웠다.

숭고한 목적이었다.

 

그러나 가라르는 관동지방이 아니었다.

 

가라르지방에는 인간을 안전하게 지키는 시스템이, 그리고 풍요로운 천연자원이 있었다.

가라르에서는 대도시 뒤편에서 잔악한 범죄조직이 지방의 경제를 송두리째 쥐고 흔들고 있지도 않았고, 평화로운 도심과 호수를 통해 곧바로 이어진 동굴 안쪽에서 유전자 조작 실험의 결과물이 인간을 향한 복수심을 불태우고 있지도 않았다.

로즈는 관동 포켓몬리그의 권위를 이해했으나, 그러한 리그가 탄생한 배경은 이해하지 못했다.

가라르에는 평화를 지키고 지방을 유지하기 위한 최강의 트레이너 군단 따위 필요하지 않았다. 다만 평화 특유의 무료함이 사회에 전반에 독처럼 스며들어 있었으며, 모두가 해독제를 찾아 아낌없이 지폐를 휘날렸다.

천 년 뒤의 몫까지 끌어모아 넘쳐흐르는 부―그것이 가라르의 가장 큰 절망이자 유일무이한 희망이라는 것을 로즈는 알았다.

 

가라르의 포켓몬리그는, 부유하고 평화로우며 절망한 지방의 시민이 구매할 수 있는 형태의 희망이 될 것이다.

 

너는 그 희망의 횃불을 들어라, 로즈는 열다섯이 된 단델에게 말했다.

 

로즈가 처음 만난 단델은 열두 살이었다.

펄롱마을의 소년은 집안에서 키우는 우르를 몰고 있었다. 가라르지방 남쪽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우르에는 전혀 특별할 것이 없었지만, 소년이 우르를 쓰다듬는 손길에는 포켓몬을 따르게 하는 특별한 힘이 있는 듯했다.

아이의 눈빛은 어둡고도 흔들림이 없었고, 조금 굳어있는 얼굴에는 다만 간절함이 서려 있었다.

 

소년에게는 부친이 없었고, 모친은 둘째 아이를 배고 있었다. 소년의 집안은 부유한 편이 아니었으나, 목장 일을 늘리고 보모를 고용하지 않는다면 키우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터였다. 정부에서 지원금을 받는 포켓몬 박사 정도가 예외로, 펄롱마을에서는 대체로 그런 식으로 살아갔다.

소년은 다르고 싶었다.

동생따위 돌보고 싶지 않았고, 아버지의 빈자리를 후회하고 싶지도 않았다. 펄롱마을에 널린 우르 따위가 아니라, 커다란 날개가 달린 드래곤 포켓몬을 키우고 싶었다. 그래서 최강의 드래곤 포켓몬과 함께,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훨훨 날아가고 싶었다.

 

단델에게는 재능이 있었다.

포켓몬을 따르게 하는 재능, 더 높은 곳을 바라보는 불만족의 재능, 그리고 배틀에서 이기는 잔혹함의 재능을 두루 갖춘 재목이었다.

 

챔피언의 눈을 한 소년이여. 

 

로즈는 단델을 결재했다.

 


 

금랑은 자신이 이 거대한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가장 잘나가는 광고모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그러한 사실이 인터넷에 사진을 올리는 손가락을 멈출 수는 없었다. 누가 뭐래도 금랑이 관장 일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었다. 시선, 시선, 시선. 애정 어린 시선, 존경과 경외의 시선, 차가운 경멸과 진득한 혐오의 시선까지도 금랑은 전부 맛있게, 배고프게 삼켰다.

로즈는 전면적으로 업로드를 금지하지는 않겠다며 선심 쓰듯 ‘타이밍, 상황, 그리고 사진 자체의 퀄리티를 가려가며’ 취미를 누릴 것을 당부했지만, 금랑이 듣기로는 그냥 하는 말에 지나지 않았다.

‘금랑’을 대체할 사람은 가라르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니까, 여덟 번째 체육관 관장의 자리에 금랑보다 어울리는 인물은 없었다.

유니폼을 입은 옷 위로 쏟아지는 시선을 사로잡는 아름다운 근육, 조각상 같은 얼굴. 맑은 호수와도 같은 정적인 기품, 폭풍우와도 같은 동적인 기세. 가라르가 키워낸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실력.

그리고 진심.

열망,

금랑은 우습다고 생각했지만―금랑에게도 그것이 있었다. 고작 ‘레어’ 리그 카드를 남아돌 정도로 잔뜩 인쇄하는 일로 리그를 한 방 먹였다며 킬킬거리는 인간인 금랑은, 그것을 썩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금랑은 가라르리그에 야망이 있었다.

금랑은 꿈이 있었다.

금랑은 챔피언단델이 되고 싶었다.

가라르 챔피언단델이라는 것의 본질이 매크로코스모스라는, 혹은 가라르라는 이름의 브랜드를 온몸에 휘감은, 쇼윈도에 진열된 가장 비싼 상품에 지나지 않더라도.

어차피 가라르에서 태어난 인생이란 그런 법이다.

그 하찮은 삶 속에서 단델이 빛나고 있었다.

거대한 항성처럼, 유리로 된 쇼윈도가 전부 새하얘질 정도로, 가라르 전체를 불태워버릴 것처럼.

그것도 전부 광고라고 한다면, 제대로 먹혀들고 있었다.

상관없었다.

금랑은 그것이 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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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30

 

 

그는 하나지방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짧은 치마 트레이너다.

이 국가가 장려하는 10세 인간의 삶을 충실하게 이행한, 거친 숲길과 동굴을 지나 포켓몬센터에서 포켓몬센터를 전전한, 그리고 결국에는 여덟 개의 배지를 전부 손에 넣을 수 있기 전에 포기하고 정착함으로써 꿈을 포기한, 포켓몬 리그라는 시스템이 리그 챔피언의 환상을 대물림하는 수단인 평범한 트레이너.

배지 케이스 안에는 승리의 훈장인 동시에 좌절의 상징인 포켓몬 리그 공인 체육관 배지가 다섯 개 빛나고 있다.

아아, 좋은 시절이었지.

좋은 시절은 좋은 시절로 추억될 수 있다면 그걸로 좋다. 이제는 눈을 돌려 현실을 본다. 어린이를 통제하는 것은 포켓몬 리그지만 어른을 통제하는 시스템은 그것보다도 더 거대한 자본의 시스템. 하나지방 자본주의의 중심 블랙시티, 그곳에 정착할 수 있었던 그는 행운아였다.

더이상 꿈은 없었다. 다만 부자와 권력자들이 정교하게 만든 틀이 있었고, 그는 자신의 여생을 이미 그 틀에 부었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그는 그것에서 갑갑함보다는 평안을 느꼈다.

 

스쳐 지나간 것은 가게에서였을까.

당신은 무언가를 계산하고 있었다. 직원은 당신이 건넨 카드를 묵직해 보이는 돌 하나와 함께 돌려주었다. 손에서 손으로 옮겨지던 돌은 상당히 빛나고 있었다. 진화의 돌, 그중에서도 빛의 돌임을 한때 체육관을 순회했던 그는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그쪽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아마도 빛의돌이 밝았기 때문에.

그리고 당신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자신을 현실주의자라고 자신했으며, 그러니 한눈에 반하는 일 따위는 더더욱이 믿지 않았다. 그러나 한때는 자신이 리그 챔피언의 꿈을 포기할 것이라고도 믿을 수 없었겠지.

 

흑의 마천루는 블랙시티의 대표적인 관광지이자 수입원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많은 블랙 시티 주민들의 길티 플레저였다.

최강의 트레이너, 포켓몬 리그 제패, 챔피언 같은 말에는 ‘한때는 그랬었지’ 하고 냉소하면서도 퇴근 후에는 마천루의 꼭대기를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사실은 많다는 것을 모두가 알았지만 아무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마천루 안에서는 모두가 초면이었다.

그는 당신이 마천루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밖에서 보면 높디높은 마천루였지만, 정작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그 높이를 가늠할 수 있는 수단은 엘리베이터 버튼의 숫자뿐이었다. 잘 지어진 엘리베이터는 붕 뜨는 감각조차 없어서, 마천루에는 배틀에 전념하라는 듯 창문도 없이 오로지 인공적인 빛뿐이어서.

그래서 그는 자신이 8층에 위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까 쓰러뜨린 연구원이 게이트 트레이너는 9층에 있다고 했다. 포켓몬들은 거의 한계였고, 의사에게는 이미 한 번 부탁했기에 다시 한번 회복을 부탁할 수도 없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나아갈 수 있는 만큼을 나아가고, 실패하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가 다시 한번 올라갈 뿐이다.

마천루를 아무리 오른다고 해서 누군가가 챔피언이라고 불러주지도 않고, 보스 트레이너를 쓰러뜨린다고 해서 훈장을 달아주지도 않는다.

어른들의 놀이이므로, 마천루에는 패배의 리스크가 없다.

그는 아직 당신을 만나지 못했다.

당신이 거기에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아직 만나지 못한 당신이 그저 더 높은 곳에 있을 것이라고, 아득하게 상상했다.

 

우리는 마천루의 옥상에 있었다.

(오르고, 또 오르면 옥상에 가 닿을 수 있나요? 꼭대기 층까지 오르면 거기엔 파랗고 녹색이고 형광인 조명이 아닌 햇빛이 닿나요? 아득바득 올라왔던 높이를 위에서 내려다보며, 이 도시는 정말 새카맣구나, 하고 웃을 수 있나요?)

불어오는 바람에 갈색 머리와 코트를 휘날리며, 난간도 없는 옥상에서 당신은 무얼 보는지 곧은 자세로 가만히도 서 있었다.

그런 당신을 뒤돌아보게 하는 것은 그의 발소리였다.

블랙시티에 집어 삼켜진 구두 소리, 그러나 아직은 앳된 걸음 소리가 당신을 뒤돌게 했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어.

당신의 목소리는 다정했다.

최강의 포켓몬 트레이너 같은 꿈은 진즉에 끝나있었다.

그것은 국가에서 어린이들에게 일괄적으로 심었던 꿈으로, 어쩌면 그것은 처음부터 그의 꿈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긁히고 찢기고 뼈가 부러져가면서 얻은 체육관 배지조차, 스스로 원한 적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흑의 마천루를 오른 것만큼은 그의 의지였다.

그는, 

오로지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 여기까지 올라왔다.

당신은 그의 첫 번째 꿈이었다.

―여기까지 왔으니까 이젠 괜찮지 않겠어?

그는 당신이 점점 가까워져 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거리가 좁혀져, 당신의 얼굴밖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의 입술 위로 포개져 오는 당신의 입술은 부드러웠다.

이제는 괜찮은 것 같아요,

그렇게 생각했을 때 발밑이 사라졌다.

 

몇 층 높이를 떨어진 것인지, 그는 모른다.

 

눈을 떠도 그것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날의 퇴근 후에는 흑의 마천루에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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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3

 

1. Time is Running Out

 

 쥰은 늘 시간에 예민했다. 시간은 거스를 수 없이 절대적이며, 방심하면 모든 것을 헤집어놓는 첨예한 것이라는 것을 쥰은 아주 잘 알았다. 세상은 무지하게도 아주 느긋했지만, 쥰은 그들과 달랐다. 쥰은 시간에 익숙해지지 않고, 무뎌지지 않는다.

 포켓몬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신지의 발끝 정도밖에 미치지 못하는 트레이너가 그런 식으로 말했을 때, 쥰은 화가 났다. 포켓몬을 사랑하는 것은 자신도 마찬가지, 정성을 다하고 싶은 것도 마찬가지. 하지만 시간이 없었다. 시간의 무서운 점은 뭐가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는 점이다. 강해지고 싶다고 생각했다면, 변하기 전에 움직여야만 한다. 강하고 싶다고 생각한 자신이 변하기 전에, 혹은 강함이 변하기 전에.

 아무리 빠르게 달려도 내일의 자신은 앞지를 수 없지만, 쥰은 달렸다. 10초 정도라면 앞지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10초 전. 9초 전. 8초 전…

 

2. 긴 햇빛 속에 있다보면

 

 히카리.

 코우헤이는 그 이름이 참 좋았다. 그 주인과 꼭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히카리는 참, 밝고 눈부신 사람이었다. 코우헤이는 그 사람이 참 좋았다.

 작은 인연이 자신과 자신의 삶을 얼마나 뒤바꾸어놓았는지, 그는 평생 모를 것이다. 예정조화처럼 평탄하게 흘러가던 삶에 당신이 얼마나 햇빛처럼 쏟아졌는지, 그러자 사각형 인공공간 같은 삶에 어떤 계절들이 생겨났는지. 당신은 평생 모를 것이기에, 코우헤이는 자신이 잘 하는 것을 하기로 했다―코우헤이는 펜을 들었다.

 ‘코우헤이’가 공평하다는 뜻인 것은 알고 계시겠지요. 십 년을 살아도 삶이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아서 포켓몬을 받고 여행을 떠나면 무언가가 생기리라 기대했는데, 여행을 떠나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아서, 그저 평이해서, 이름이란 참 중요하구나 생각했어요. 그런데 ‘히카리’를 만나고서 처음으로 그 단단한 삶의 균형에 균열이 생긴 거 있죠. 눈부시게 빛나는 당신을 생각하면, 역시 이름이란 참 중요하구나 생각하게 돼요.

 태그배틀 때, 당신을 처음 만나고서,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흘러가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나요. 그 이후로 당신이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몰라요. 당신과 헤어지고 나서 계절이 참 느릿했는데, 여름에 만난 당신이 얼마나 기적 같던지. 더운 공기와 아지랑이 속 당신의 모습이 꼭 꿈처럼 지나갔어요.

 이제는 가을이 한창인데, 계절이 또 느려졌어요. 사실 지금껏 상대성이론에 그다지 공감하지 못했는데, 당신이 증명해주었어요. 히카리상. 지금도 당신은 열심히 하고 있겠지요? 저는 열심히 하고 있답니다. 또 당신과 만나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그렇게 하고 싶다는 기분이 들었어요. 전부 당신과 만나고서부터예요.



3. 아버지 날 보고 있다면 정답을 알려 줘

 

 확 죽여서 묻어버리고 싶다. 화석이 되었을 때쯤 캐내어줄 의향은 있었다.

 생각을 털어버리려고 하듯이, 효우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런 생각은 화석에 대한 모욕이다. 게다가 이렇게 생각해버리면 평소에 다른 무언가가 화석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것이 다 폭력적인 생각이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사실 화석은 효우타가 가장 사랑하는 것이라, 평소에 누군가가 화석이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생각은 사랑하는 이들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란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토우간 그 자식은…… 죽여서 묻어버리고 싶다는 뜻이었다.

 화석을 캐기조차 싫은 날은, 무조건 토우간의 책임이었다. 화석에 대한 열정마저 놈에게서 물려받은 성질이라 생각하면 혐오스러웠다. 효우타의 표정이 어두운 날이면, 탄광의 작업원들도 알아서 그가 돌아갈 때까지 말을 걸지 않는 배려를 보였다. 쿠로가네시티에서 어느정도 지낸 사람들은 다 현 짐리더와 전 짐리더의 집안사정을 알았고, 누가 보아도 압도적으로 전 짐리더 쪽의 잘못이 컸다.

 ‘화석이 좋다!’ 하고 무식하게 외치곤 하는 아버지는, 그런 식의 고백으로 어머니와 결혼하게 된 것일까. 다음주는 결혼기념일이다. 효우타는 미오시티로 가서 토우간 녀석을 집으로 끌고올 생각이었다. 변명은 받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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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25

 

조수석에 태운 신지는 아직 꿈에서 덜 깬 것 같은 멍한 얼굴이었다. 꿈이라고 한다면 안좋은 꿈이겠지. 레이지 자신도 잘 알고 있는 악몽이었다.

그래서 레이지는 별 말 없이 운전에 전념했다. 신지를 위로하거나, 격려하거나,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아니었다.

‘펑!’

그때 굉음과 함께 백미러가 번쩍여서, 형제는 반사적으로 뒤돌아보았다. 방금 막 떠나온 킷사키 방향. 어쩌면 신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도 모른다―아니, 조용한 킷사키시티에서 저런 소동이 일어날만한 장소는 신전 뿐이었다. 진다이와, 아마 사토시와 그 일행이 그쪽으로 향했겠지.

레이지는 슬쩍 신지를 돌아보았다. 신지는 금새 다시 냉정하고 무관심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복잡한 일을 생각할 여유가 없는 것이겠지. 그렇게 이해한 레이지는 다시 액셀을 밟았다. 방향은 틀지 않았다. 진다이에 사토시까지 있다면 어떤 문제든 잘 풀릴 것이 틀림없기도 했고, 지금의 너덜너덜한 우리는 발목을 잡기보다 더할까. 아마 신지도, 무표정하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우선은 집에. 집에 가자.

차창 밖의 풍경은 하얗게, 푸르게 색을 바꿔가며 신오우의 아름다움을 전시했지만, 얼굴을 정면으로 향한 신지의 눈에 그 풍경은 담기지 않는 듯했다. 잠깐 새에 아주 많은 일이 일어났다. 신지는 거의 과부하 상태였다. 준비가 되지 않은 채 하드플랜트를 쓴 포켓몬처럼. 마른 하늘에 돌연 배틀 피라미드가 나타났다. 분명 질나쁜 농담이었다. 몇 년의 세월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기억에 새겨진 모습 그대로의 얼굴이었던 진다이. 몇 번이고 도전한 끝에 이길 수 있었다고 천진하게 웃던 사토시. 조종당하듯,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신지는 강요받았던 배틀. 이후로는 쭉 나쁜 기억의 재현이었다. 재연이었다. 하지만 구원의 줄을 내려준 것은 형의 제안이었다. 사토시에게 이길 수 있다면. 어이없이 알량하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자존심도 다시 회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심한 트레이너에 한심한 포켓몬이다. 질 리가 없어.

하지만 그건……

…….

레이지는 어느새 잠든 동생의 얼굴을 보곤, 비축하고 있던 한숨을 토해냈다.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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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22

 

 

「레인저보다 먼저 아루미아의 성에서 푸른 돌을 찾아오라.」

 

 아이스는 안절부절못하며 지령을 노려보고 있었다. 잘근 씹은 입술에서 피가 날 것 같은 차에,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스는 모니터 하단의 시계를 보았다―곧 수업시간이다. 이오리 박사가 잠겨있지 않은 문을 열고 들어온다.

 아이스가 의자를 돌려 이오리를 본다.

 

 “오. 어서와, 이오리 박사.”

 

 아이스는 다리를 꼬고, 턱을 괸 채 앉아있다. 이오리가 꼬링크처럼 쫄래쫄래 다가온다. 아이스는 이오리를 향해 미소를 짓는다.

 

 “안녕하세요, 아이스 씨. 잘 주무셨나요? 충분한 수면을 취하는 것도 성장에 있어서 공부만큼 중요하다고, 레인저 스쿨 시절 미라카도 선생님이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피곤해 보여?”

 “글쎄요?”

 

 아이스의 물음에, 이오리가 아이스를 뜯어본다. 듣고 보니 조금 지쳐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만 윤기 흐르는 머리카락과 수려한 미소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는다.)

 

 “…약간?”

 “하하, 그래. 그럼 바로 프로그램 얘기로 들어갈까. 수열 프로그램, 도전은 해봤는데 어떠려나.”

 

 아이스가 메일 창을 최소화시키고 코딩 프로그램을 켠다. 검은 화면에 형광 초록 글씨가 한 편의 시처럼 이어져있다. 이오리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글씨들을 읽어내린다. 아이스는 이오리의 집중하는 표정에 집중한다. 프로그래밍은 흥미롭지만, 아이스에게 있어서는 프로그래밍보다 이오리 박사가 더 흥미롭다.

 뭐니뭐니해도 이오리는 아이스가 처음으로 관심을 가진 타인이다.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는 일 자체가 새롭고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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