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 트인 경기장 위로 밝은 빛이 눈부시게 쏟아진다.

파란 하늘이, 햇살이 펄럭이는 망토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진다.

역광을 받아 그늘진 얼굴, 그 가운데 두 눈이 금빛으로 반짝인다.

모래 먼지가 가라앉고, 승자의 여유로 단델은 몸의 한켠에서 조금 힘을 뺀다. 몸이 오른편으로 기울어지고, 오른손은 가볍게 주먹 쥐었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그 어떤 조명보다 더 높게 떠 있는 태양 향해 왼팔을 위로 뻗는다.

함성

세상을 가득

메운다.

단델은 빛에, 함성에, 세상에 삼켜진다.

땀 한줄기가 이마를 타고 내려오다가 속눈썹에 걸린다. 시린 눈을 살며시 감아보지만, 빛이 눈꺼풀을 관통한다.

그는 챔피언이다.

그는 정점이다.

이것이 세계의 전부이다.

그는 세계의 전부를 손안에 쥔 남자다.

단델은 쓰러질 듯한 현기증을 느낀다.

 


 

시합을 마치고 대기실로 돌아오면 아주 긴 꿈에서 깨어난 것 같다. 잠에서 막 깨어난 것처럼 눈꺼풀이 무거운 피로가 몰려온다.

높은 하늘 위를 나는 꿈을 꾸고 있었던 듯한 기분이다. 깨어난 지금은 겨우 두 다리로 성가시게 느껴지는 몸뚱이를 받치고 단단한 바닥 위에 서 있다.

"괜찮아 ~? 물 마실래?"

" ... ―어어."

멍하니 있던 단델이 한 박자 늦게 반응한다.

고개를 돌려보면 금랑이 조금 우쭐한 표정으로 생수병을 내밀고 있다. 누가 안 챙겨주면 쓰러지게 생겼다니까~. 목소리가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다.

고개를 젖히고 물을 들이켜자, 조금 정신이 돌아온다. 숨을 내뱉고, 반이 넘게 줄어든 병을 금랑에게 돌려주며 그제야 단델이 거친 목소리로 내뱉는다.

"고맙다, 금랑."

"하하. 천만에."

금랑이 가볍게 웃으며, 물기가 떨어지는 단델의 입술을 엄지로 쓱 닦는다.

단델의 아랫입술에 손가락 끝이 닿는 그 찰나, 어떤 질척한 감정이 금랑 안에서 소용돌이 친다. 손에 닿은 것을 잡아 뜯어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불에 덴 듯이 금랑이 손을 떼었다.

무능한 이 남자가 경멸스럽다. 이런 아둔한 사람에게 챔피언이라는 배역을 맡긴 가라르리그도 증오스럽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런 남자에게 패배해서 챔피언이 되지 못하는 자신이...  추하지만 익숙한 감정을 얼굴 뒤로 밀어 넣으며, 금랑은 대신 서글서글한 미소를 짓는다.

 


 

로즈는 석영리그에 가본 적이 있다고 했다.

석영리그에서 진정한 포켓몬의 힘을, 트레이너의 권위를 보았노라 했다.

그가 석영리그에서 느낀 것은 경외심, 그리고 공포였다.

그는 석영리그의 사천왕이 포켓몬과 트레이너가 도달해야만 하는 최후의 목적지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그는 가라르에 포켓몬 리그를 세웠다.

숭고한 목적이었다.

 

그러나 가라르는 관동지방이 아니었다.

 

가라르지방에는 인간을 안전하게 지키는 시스템이, 그리고 풍요로운 천연자원이 있었다.

가라르에서는 대도시 뒤편에서 잔악한 범죄조직이 지방의 경제를 송두리째 쥐고 흔들고 있지도 않았고, 평화로운 도심과 호수를 통해 곧바로 이어진 동굴 안쪽에서 유전자 조작 실험의 결과물이 인간을 향한 복수심을 불태우고 있지도 않았다.

로즈는 관동 포켓몬리그의 권위를 이해했으나, 그러한 리그가 탄생한 배경은 이해하지 못했다.

가라르에는 평화를 지키고 지방을 유지하기 위한 최강의 트레이너 군단 따위 필요하지 않았다. 다만 평화 특유의 무료함이 사회에 전반에 독처럼 스며들어 있었으며, 모두가 해독제를 찾아 아낌없이 지폐를 휘날렸다.

천 년 뒤의 몫까지 끌어모아 넘쳐흐르는 부―그것이 가라르의 가장 큰 절망이자 유일무이한 희망이라는 것을 로즈는 알았다.

 

가라르의 포켓몬리그는, 부유하고 평화로우며 절망한 지방의 시민이 구매할 수 있는 형태의 희망이 될 것이다.

 

너는 그 희망의 횃불을 들어라, 로즈는 열다섯이 된 단델에게 말했다.

 

로즈가 처음 만난 단델은 열두 살이었다.

펄롱마을의 소년은 집안에서 키우는 우르를 몰고 있었다. 가라르지방 남쪽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우르에는 전혀 특별할 것이 없었지만, 소년이 우르를 쓰다듬는 손길에는 포켓몬을 따르게 하는 특별한 힘이 있는 듯했다.

아이의 눈빛은 어둡고도 흔들림이 없었고, 조금 굳어있는 얼굴에는 다만 간절함이 서려 있었다.

 

소년에게는 부친이 없었고, 모친은 둘째 아이를 배고 있었다. 소년의 집안은 부유한 편이 아니었으나, 목장 일을 늘리고 보모를 고용하지 않는다면 키우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터였다. 정부에서 지원금을 받는 포켓몬 박사 정도가 예외로, 펄롱마을에서는 대체로 그런 식으로 살아갔다.

소년은 다르고 싶었다.

동생따위 돌보고 싶지 않았고, 아버지의 빈자리를 후회하고 싶지도 않았다. 펄롱마을에 널린 우르 따위가 아니라, 커다란 날개가 달린 드래곤 포켓몬을 키우고 싶었다. 그래서 최강의 드래곤 포켓몬과 함께,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훨훨 날아가고 싶었다.

 

단델에게는 재능이 있었다.

포켓몬을 따르게 하는 재능, 더 높은 곳을 바라보는 불만족의 재능, 그리고 배틀에서 이기는 잔혹함의 재능을 두루 갖춘 재목이었다.

 

챔피언의 눈을 한 소년이여. 

 

로즈는 단델을 결재했다.

 


 

금랑은 자신이 이 거대한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가장 잘나가는 광고모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그러한 사실이 인터넷에 사진을 올리는 손가락을 멈출 수는 없었다. 누가 뭐래도 금랑이 관장 일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었다. 시선, 시선, 시선. 애정 어린 시선, 존경과 경외의 시선, 차가운 경멸과 진득한 혐오의 시선까지도 금랑은 전부 맛있게, 배고프게 삼켰다.

로즈는 전면적으로 업로드를 금지하지는 않겠다며 선심 쓰듯 ‘타이밍, 상황, 그리고 사진 자체의 퀄리티를 가려가며’ 취미를 누릴 것을 당부했지만, 금랑이 듣기로는 그냥 하는 말에 지나지 않았다.

‘금랑’을 대체할 사람은 가라르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니까, 여덟 번째 체육관 관장의 자리에 금랑보다 어울리는 인물은 없었다.

유니폼을 입은 옷 위로 쏟아지는 시선을 사로잡는 아름다운 근육, 조각상 같은 얼굴. 맑은 호수와도 같은 정적인 기품, 폭풍우와도 같은 동적인 기세. 가라르가 키워낸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실력.

그리고 진심.

열망,

금랑은 우습다고 생각했지만―금랑에게도 그것이 있었다. 고작 ‘레어’ 리그 카드를 남아돌 정도로 잔뜩 인쇄하는 일로 리그를 한 방 먹였다며 킬킬거리는 인간인 금랑은, 그것을 썩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금랑은 가라르리그에 야망이 있었다.

금랑은 꿈이 있었다.

금랑은 챔피언단델이 되고 싶었다.

가라르 챔피언단델이라는 것의 본질이 매크로코스모스라는, 혹은 가라르라는 이름의 브랜드를 온몸에 휘감은, 쇼윈도에 진열된 가장 비싼 상품에 지나지 않더라도.

어차피 가라르에서 태어난 인생이란 그런 법이다.

그 하찮은 삶 속에서 단델이 빛나고 있었다.

거대한 항성처럼, 유리로 된 쇼윈도가 전부 새하얘질 정도로, 가라르 전체를 불태워버릴 것처럼.

그것도 전부 광고라고 한다면, 제대로 먹혀들고 있었다.

상관없었다.

금랑은 그것이 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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