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26

 

 

우는 아이에게는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을 안 주신대.

 

 소년 시절의 레이지에게는 고맙게도, 신지는 어려서부터 좀처럼 울지 않는 아이로 자랐다. 돌이켜보면 레이지가 신지에게 가르친 것이었다― 남자가, 울면 얕보이니까, 크리스마스에는, 아무튼 어떤 이유로든, ‘울면 안 돼.’

 

 포켓몬을 모으고, 배틀을 하고, 짐뱃지를 모으는 일로 바빴던 시절이었지만 레이지는 항상 기념일에는 쉬도록 일정을 조정했다. 신지의 생일, 자신의 생일, 크리스마스와 새해. 신지가 외롭지 않도록, 사람의 온기를 그리워하지 않도록.

 

 모텔 방에 작은 트리를 갖다 놓고, 전구를 둘러놓고, 촛불을 켜두었다. 라디오를 틀면 캐롤이 흘러나왔다. 식탁에서 신지와 함께 케이크를 잘랐다. 크리스마스 이브.

 이튿날 아침에 신지가 깨어나면 발견할 수 있도록, 베개 옆에 선물을 가져다 두었다. 울지 않은 신지에게.

 

 언제부터 동생과 단둘이서 덩그러니 세상에 던져진 걸까. 포켓몬과 더불어 사는 세상의 고질적인 문제는 사람이 너무나 쉽게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가족이라고 부를만한 인간들이 어느 날엔가 돌아오지 않게 되었을 때, 레이지도 신지도 이상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저 아, 이제부터는 혼자구나. 그런 생각을, 창밖에 쏟아지는 눈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고 레이지는 회상한다. 신지도 울지 않았다.

 신지가 울었다면 어떻게 했으면 좋았을지, 레이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던 시절도 있었지.

 

 “울고 싶을 땐 울어도 돼.”

 

 눈처럼 하얀 생크림으로 덮인 초콜릿 케이크를 자르던 레이지가 문득 말한다.

 

 이제 울기에는 너무 많이 커버린 것 같은 신지가 레이지를 올려다본다. 양초의 불이 흔들린다. 레이지를 마주 보고, 신지는 살짝 웃는다.

 

 “그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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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2

 

 

죽음은 끔찍한 발상이다.

 

크로스는 힘겹게 발을 내디딘다. 다리는 철근처럼 무겁게 올라가고 덜 마른 피가 피부와 옷가지 사이에서 지독하게 진득하다. 걸음이 휘청거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걷는다. 곁에서 포켓몬이 함께 걷는다. 포켓몬의 숨결이 다리에 닿아올 정도로 가까이에서 걷는다. 무거운 숨. 루가루암이 침을 넘긴다. 숲은 고요하고 그 소리는 소년에게도 들린다.

 

우리가 너무 깊이 들어온 것 같아.

 

이대로 엠라이트를 찾지 못하면 어쩌지.

 

그런 생각은 말로 꺼내어지지 않는다. 결코. 크로스는, 그리고 그와 길을 같이하는 짐승들은 일체의 약함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자유분방하게 뻗은 거친 나뭇가지나 뾰족한 바위에 찔려 생채기가 늘어날 때마다 하나의 특정한 생각이 서서히 퍼지는 독처럼 머릿속을 잡아먹는다.

 

여기서 죽으면 어쩌지.

 

죽을 때까지 함께, 같은 생각은 하지 않는다. 소년과 포켓몬 사이의 관계는, 인연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포켓몬의 시선이 질기게 소년에게 고정되어있다. 들짐승의 시뻘건 눈빛을, 소년은 주춤하지 않고 온몸으로 받아낸다. 결코 무너지지 않겠다는 것이 그들의 각오이다. 자신에게도, 서로에게도 약함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것.

 

신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무엇이든 간에 굽어살피는 박애주의적이고 희생적인, 경전 속 상냥한 신 따위는 날조라는 것을 소년은 포켓몬과 함께 삶이라는 여행을 통해 배웠다. 나약한 인간들이 지어낸 날조. 그런 것을 믿고 기도했던 세월이 걸음마다 무너져내린다. 강하고 아름다운 자를 주관적으로 편애하는 탐욕스러운 신―한낱 인간이나 짐승 따위, 일생 자신을 갈고닦아 죽음의 문턱에서야 신의 발치에 도달할 수 있었다.

 

소년은 더는 경배하지 않는다.

 

살아서 신의 발치까지 기어올라, 끌어내리고, 쳐죽일 것이다. 그리고 일어설 것이다. 그 욕망만이 소년을 계속해서 움직이게 했다. 그리고 그 목표를 완수하지 못할 생명에 가치 따위는 없었다. 이런 숲에서 쓰러질 정도라면, 영광 받을 자격도 없다. 도달해야 할 자리는, 오직 왕좌에, 여기에서 쓰러진다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깜깜해지는 숲의 밤 속에서, 루가루암의 두 눈이 충혈되듯 붉게 빛난다. 침이 묻은 뾰족한 이빨이 번뜩거린다.

 

여기서 쓰러진다면 저 어금니의 먹이가 되겠지.

 

소년이 낮게 웃었다.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포켓치의 배터리는 아직 살아있다. 전설의 포켓몬의 위치를 가리키는 마커가 아직 같은 곳에 멈추어있다. 분명히 이 숲속, 분명 이 근처. 감정의 신 엠라이트. 쓰러뜨려 주마. 쓰러뜨리고……

 

 

 

“……?”

 

녹색.

 

숲?

 

녹색…… 회색?

 

“아, 크로스. 눈을 떴구나.”

 

숲이 아니다―사람. 낯익은 얼굴.

 

“너는 죽고 싶은 거니?”

 

소우지.

 

크로스는 주위를 빙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실내다. 숲의 냄새도 전혀 없고, 대신

 

엷은 약 냄새가 감돈다. 과하게 깨끗한 냄새. 무엇이든지 잊어버리고 편안해지라고 강요하는 듯한 인테리어. 포켓몬센터. 온몸이 욱신거린다. 실려 온 모양이다. 살아있는 모양이다. 그치만 어떻게?

 

“운이 좋은 줄 알도록 해.” 숲 같은 녹색의 소년이 무기질적인 눈으로 내려다본다. “나도 엠라이트를 쫓고 있었어. 우연히 너와 비슷한 타이밍이 아니었다면…… 너는 죽었을 거야.”

 

소우지는 심각한 내용의 책을 읽듯이 말하고, 그때 탁자 위에 놓인 몬스터볼 속에서 루가루암이 뛰쳐나온다.

 

“왜 네가 거기서 나와.”

 

크로스는 루가루암에게 묻고, 소우지가 대신 대답한다.

 

“위급상황에서는 포켓몬을 몬스터볼에 돌려보내도록 해. 그렇게 하는 편이 포켓몬만이라도 안전할 수 있으니까.”

 

문득, 소우지가 얼굴을 구긴다.

 

“그리고 네 경우엔……”

 

루가루암이 제 파트너에게 담담한 시선을 보냈다. 불신과 동시에 신뢰인 눈빛. 다른 한쪽의 트레이너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약한 녀석은 죽으면 돼.”

 

그렇게 뱉어내곤, 몸을 일으키려고 한 크로스의 움직임은 꿈틀거림에 그쳤다. 그 광경에 소우지가 작게 키득거렸다. 그리고 품에서 낡은 전자기기를 꺼냈다. 크로스의 물건이었다.

 

“입은 살았네. 그리고 포켓치는 압수야.”

“야!”

 

자신의 물건을 낚아챌 심산으로 기세 좋게 손을 뻗은 크로스였지만 물어뜯기는 듯한 통증과 동시에 반사적으로 팔을 다시 내렸다.

 

“그러다간 팔을 잃을걸. 얌전히 쉬도록 해.”

“내 포켓치를 내놔라.”

“포켓치는 인간의 편의성을 위해 만들어진 기계지, 위험에 빠뜨리기 위해서 만들어진 기계가 아니야.”

“너랑은 상관없는 일이다.”

“크로스.”

 

소우지가 허리를 숙여, 다른 한 명의 소년과 시선을 맞추었다. 은빛 호수 같은 눈이 단단한 금빛으로 넘쳐흐른다. 색소가 옅은 입술이 야무지게 움직여, 단호한 문장을 형성한다.

 

“우리는 동료야.”

 

고요하게, 무겁게 선언한 소우지가 금세 물러났다. 누워있는 채로, 크로스가 눈동자를 굴려 자리에서 일어서는 소우지를 올려다보았다.

 

“누구 멋대로.”

“내가 정한 게 아니야, 그렇게 되어버린 거지.”

 

신을 탓해도 좋아, 소우지가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크로스가 대답했다―나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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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07

 

 

 머나먼 북쪽 지방의 설산은 아무리 높이 솟아있어도, 저 멀리까지 내다보아도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죠토에서는 보이지 않는 산을 향해 기도하는 것을 승려들은 이단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불탄탑을 향해 기도했다. 나이를 먹은 승려들은 온종일을 기도했고 소년은 하루에 세 번 기도했다. 아침에는 방울탑을 향해, 황혼녘에는 불탄탑을 향해 앳된 목소리로 야무지게 기도문을 외웠다. 열심히 기도한 소년만이 무지개용사로 간택된다는 것은 인주시티에서는 누구든 아는 사실이었다. 생명의 신을 숭배하는 그들이 모르는 것은 생명으로 넘치는 세계를 낳은 창조신의 존재였다. 그래도 크로스는 밤에는 꿋꿋하게 천관산을 향해 기도했다. 소년의 유년기였다.

 

 인주시티의 소년들은 하나둘 수도원에 들어가기 시작했지만 이단은 수도승이 될 수 없었다. 이 사실을 마주한 소년의 양친은 드디어 인주시티를 뜨기로 했다. 창조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식한 세계라면 우리에게는 세계를 바꿀 의무가 있다고, 멀고 먼 동쪽으로 항해하는 배에서 소년에게 어머니가 속삭였다. 미개한 죠토가 받아들이지 못한 세계의 진실을, 행성 반대편의 사람들이라면 이해해줄 것 같았다.

 

 알로라에서도 소년은 이단이었다. 섬 주민들은 수호신을 섬겼다. 그리고 열 살이 된 소년은 불꽃 타입 포켓몬이 든 몬스터볼을 받았다.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고 말리는 양친을 뿌리치고 소년은 몬스터볼을 손에 쥔 채 마을 축제에 모습을 드러냈다. 카푸코케코에게 바치는 것이라고 하는 배틀에서 소년은 형편없이 패배했고, 이긴 아이는 카푸코케코님께 힘을 받았다며 까르르 웃었다. 소년은 강해지리라고 다짐했다. 강해져서 생명의 신도, 창조의 신도 증명해내겠다고, 소년은 이를 갈았다.

 

 머리가 크고 키가 커도, 모든 섬의 왕을 이기고 모든 시련을 넘어서도, 소년은 이단이었다.

 

 

 

 

 

 호우오우가 무지개용사로 간택한 것은 하루도 빠짐없이 기도한 인주시티의 소년도, 신성(神性)을 증명하기 위해 모든 시련을 이겨낸 알로라의 순례자도 아닌, 피카츄를 업은 마사라타운의 물러터진 포켓몬 박애주의자였다. 증명하고자 한 신성은 고작 인간의 사악한 마음 하나에도 쉽게 침범당해 썩어문드러지는 연약한 것이었다. 가치라곤 우정밖에 모르는 멍청한 소년의 부름 한 번에 몬스터볼에 잡힌 포켓몬처럼 순순히 오가는 정도의 우스운 신성이었다.

 

 한순간 자신이 누구였는지도 잊어버릴 정도로 현란하게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호우오우는 황홀하게 바라보며 크로스는 간신히 무지갯빛 날갯짓 사이의 숨겨진 연약함을 떠올렸다.

 

 그것이 완전한 이단이 되는 것을 의미하더라도, 허황한 인주시티의 승려들의 신앙을 크로스는 더는 가지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그 호우오우가 쓰러뜨린 소년을 크로스는 쓰러뜨리지 못했다. 덜 증명해낸 강함만은 미련이었다. 창조의 신은 포켓몬과 인간을 만들어냈고, 무지개신 호우오우를 만들어내 포켓몬의 생명을 관장하게 했다. 창조신은 그러나 인간이 살아남는 것은 개인의 몫으로 남겨두었다.

 

 하나의 신을 살해당한 이단아 소년은 강한 것만이 살아남는다고 다시금 마음에 새겼다.

 

 

 

 

 

 “네가 말하는 창조신은 아마 존재할 거야.”

 

 소우지가 말했다.

 

 “공간을 창조한 포켓몬과 시간을 창조한 포켓몬의 신화는 신오에서는 잘 알려진 신화야. 그만큼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는 그 두 마리를 창조한 포켓몬에 대한 신화지. 요즈음은 알 사람은 다들 알지만.”

 

 부드럽고 침착한 목소리로 소우지는 크로스가 알던 세계를 흔들었다. 익숙하다는 듯이 석판과 유적과 설산에 관해 이야기하는 사람이 눈앞에 있었다. 크로스는 평생 본 적이 없었던 머나먼 북쪽의 설산이, 창밖을 내다보면 보였다고 하는 사람이.

 

 “신오의 창세신화가 다른 지방에서는 이단 취급을 받는다니, 놀라운걸.”

 

 루가루간이 크로스를 대신하여 웃었다.

 

 “신오에 가본 적은 없는 거야?”

 “없어.”

 

 꿈속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꼭 가봐. 특히 칸나기타운의 유적이랑 미오시티의 도서관은 네가 꼭 가봐야 할 것 같아. 아, 하쿠타이시티에도 동상이랑 석판이 있어.”

 “천관산은 가본 적 있냐?”

 

 크로스가 설산의 이름을 대자, 미소를 떨어트린 소우지가 서늘하게 대답했다.

 

 “거긴 너 같은 녀석이 갈 곳이 아니야.”

 “시험해 보든가.”

 

 크로스가 몬스터볼을 들었다.

 

 한숨을 내쉬며, 소우지가 루카리오를 내보냈다.

 

.

.

 

 “창조신을 만나면 어떻게 할 거야?”

 

 쓰러진 루카리오를 몬스터볼에 돌려보낸 소우지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쓰러트린다.”

 

 승리의 흥분을 정돈하며 크로스 역시 가오가몬을 몬스터볼로 되돌렸다.

 

 “믿는 거 아니었어?”

 “창조신을 뛰어넘을 수 있는 녀석은 그야말로 최강이겠지.”

 “그럼 신성모독이라는 생각은 안 들어?”

 “그렇게 해서 더 강해질 수 있다면 얼마든지 모독하겠어.”

 “신을 끌어내릴 셈이구나. 그래, 신이 없으면 이단도 없겠지. 혹은 모두가 이단이 되거나. 너를 이단이라고 부른 녀석들한테 복수 하고 싶어서 그래?”

 “웃긴 소리를 하는군. 더 강해지기 위해 기도하는 삶을 그만두고 싶을 뿐이다.”

 “믿기 싫어진 종교는 그만 믿으면 그만이야, 크로스. 그건 온전히 네 자유고, 너는 그러기 위해 아무것도 증명할 필요 없어. 내가 충고하건대, 무리하지 마.”

 “배틀에서 진 녀석이 하는 말에 무게는 없어.”

 “거 봐, 결국 너를 위해 네 포켓몬이 무리하게 돼. 넌 천관산을 오를 자격이 없어.”

 

 소우지는 곧은 눈빛을 하고서 또박또박 말했고, 목소리는 이기고 살아남는 것과 패배하고 사라지는 것으로 이루어진 크로스의 세계에 이물질처럼 들어왔다.

 

 “네가 뭐라고 하든 나는 갈 거다.”

 

 나와 함께라고 말하듯이 크로스의 곁을 지키던 루가루간이 비죽 웃었다. 그러자 여전히 흔들림 없는 눈으로 소우지가 대답했다.

 

 “어쩔 수 없으니까 나도 같이 갈게.”

 

 

 

 

 

 동행자는 필요 없고, 약한 녀석이라면 특히 필요 없다―그렇게 말한 크로스였지만, 결국 집요하게 구는 소우지를 떼어내지 못하고 나란히 설산을 걷고 있었다. 높게 쌓인 눈 사이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발이 푹푹 잠기는 감각은 크로스와 루가리간에게 있어 사뭇 새로웠다. 반면 소우지는 표백된 듯한 무표정으로, 다만 요령 있게 길을 나아가고 있었다.

 

 “조금 더 걸으면 정상이야.”

 

 디바이스를 확인하며 소우지가 말했다.

 크로스의 걸음이 빨라졌다.

 

 “조심히 걸어. 여기서 넘어지면 몸이 젖어서 체온이 확 내려가니까.”

 “시끄럽게 구는군.”

 “중요한 거야.”

 

 자, 이쪽으로. 소우지가 또 동굴 속으로 크로스와 루가루간을 안내했다. 천관산은 동굴과 설원의 반복이었다. 동굴로 들어가고, 나와서 설원을 한참 걷고, 다시 동굴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와서 눈을 헤치고 걷다 보면 또 들어갈 동굴이 나왔다.

 

 “여기선 바닥 조심하고. 습기가 얼어서 미끄러워.”

 

 “넘어지는 게 무서우면 돌아가면 돼. 시끄럽게 굴 거면 돌아가라.”

 

 “나는 안 넘어지고 안 무서워. 내 얘기를 하는 게 아니라―”

 

 동굴을 빠져나오자 금빛이 눈을 찔렀다. 반사적으로 찌푸린 눈을 천천히 다시 뜨자 계단과 금색 타일로 된 바닥, 같은 금빛으로 높게 솟은 수많은 창의 위압적인 모습이 펼쳐졌다. 일순 숨을 쉬는 것을 잊었던 소우지가 호흡을 내뱉자 탄성 같은 소리가 나왔다. 크로스는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먼저 마음을 가다듬은 것은 소우지였다.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네. 여기가 천관산 꼭대기, 창기둥이야.”

 

 “…….”

 

 “시간의 신과 공간의 신이, 여기에 강림했었대.”

 

 그리고 문득,

 

 “그런데 지금은 참 아무것도 없지 않아?”

 “하?”

 “물론 유적은 화려하지만, 결국 그것뿐이잖아. 무리해서 올라올 것 없었어.”

 “계속 중얼중얼 시끄럽네 진짜, 너―”

 

 무의식적으로 소우지에게 달려든 크로스가 몬스터볼에서 뛰쳐나온 루카리오에게 움직임을 막혔다.

 

 ―루카.

 

 소우지는 살짝 놀라며 루카리오에게 타일렀다.

 

 “괜찮아, 루카리오. 몬스터볼에 돌아가.”

 

 루카리오의 붉은 시선이 지긋이 소우지를 응시했다. 시선을 온전히 돌려주며, 소우지가 반복했다.

 

 “괜찮으니까 볼로 돌아가 줘.”

 

 소우지가 루카리오의 몬스터볼을 내밀고 버튼을 눌렀다. 루카리오는 반항 없이 붉은 빛의 안내를 따라 캡슐 안으로 되돌아갔다. 루카리오가 안전하게 볼로 되돌아간 것을 확인한 소우지는 다시 시선을 크로스에게로 돌렸다.

 

 “포켓몬은 인간보다 아주 조금 강할 뿐이니까.”

 “뭘 말하고 싶은 거냐.”

 “트레이너가 위험에 처하면 트레이너를 지키려고 하는 포켓몬도 위험에 처해.”

 “그게 뭐 어떻다는 거지.”

 

 고해성사처럼 진지한 태도로, 소우지가 천천히 말했다.

 

 “나는 여기에 오려고 하다가 포켓몬을 잃은 적이 있어. 여긴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데.”

 

 선언을 끝낸 소우지가 입을 꾹 다물었고, 소우지의 저의를 깨달은 크로스의 입꼬리가 꿈틀거리며 올라갔다.

 

 “하! 약한 녀석에게 어울리는 이야기군.”

 

 소우지가 처음으로 흔들리는 표정을 보였다. 크로스는 왠지 흥겨워지기 시작했다.

 

 “나랑 내 포켓몬은 그렇게 약하지 않아.”

 “그래, 그건 참……”

 

 한숨이 하얗게 나왔다. 크로스의 시야가 뿌옇게 된 사이에 소우지가 문장을 마쳤다.

 

 “다행이네.” 

 

 

 

 

 

  “결국, 창기둥에 별다른 힌트는 없었네. 너는 계속해서 창조신을 찾을 거야?”

 “당연하지. 찾아서 쓰러트린다.”

 ‘쓰러트려서 뭐 하게?’

 

 소우지는 고개를 저었다. 이런 녀석에게 걱정은 과분하다.

 

 “너와 네 포켓몬이라면 그렇게 할 수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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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3

 

 

인기척을 느낀 신지가 포켓몬을 몬스터볼로 되돌려 넣었다.

 “돌아와, 마뉴라.”

 육신이 입자로 축소되기 직전의 찰나에 포켓몬은 도륵, 눈을 굴려 다가오는 소년을 짧게 쳐다보았다. 마뉴라의 모습은 금세 몬스터볼 속으로 사라졌지만, 붉은 시선은 예리하게 남아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토시는.

 “신지, 신지 맞지?”

 달빛이 가벼운 어두운 밤이었다. 바위 위에 앉아있는 트레이너의 모습도 대략적인 윤곽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신지임을 알아보기에는 충분한 정도였다. 알고서도 묻는 말. 신지는 굳이 답하지 않았다. 사토시는 그의 무시를 담담하게 받아들이고는, 더욱 다가갔다.

 “이렇게 밤늦게까지 훈련 중인 거야?”

 “그렇다면 어쩔 거지.”

 “역시 신지는 대단하구나. 우리도 분발해야겠어. 그렇지, 피카츄?”

 사토시의 어깨 위에 자리 잡은 포켓몬이 피카, 하고 제 이름을 울렸다. 응, 우리도 힘내자. 지지 말자. 그런 의미가 담겨있을 소리. 몬스터볼에 돌려놓은 포켓몬의 침묵과 대조되는 소리. 사토시는 그런 대조가 늘 의아했다. 왜 그는 모든 것이 자신과 대조되는지. 같은 목표를 가진 포켓몬 트레이너인데,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 있는지.

 신지는 아예 말을 하지 않았다.

 ‘전에는 이렇게까지 과묵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사토시는 그런 생각을 하며, 신지에게서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을 만한 다른 말들을 찾아보았다.

 고집스레 침묵하는 신지의 등 뒤에서부터 물소리가 들려왔다. 신지는 두 눈을 부릅뜨고 사토시를 보았다.

 신지는 사실은 고요하지 않았다. 표정을 굳히고 입을 다문 그를 대신해 폭포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쏟아지고 있었다.

 “…동료는 버렸냐?”

 “타케시랑 히카리 말이야? 다들 포켓몬 센터에서 쉬고 있는데, 나만 왠지 오늘은 잠이 안 와서 조금 나와봤어. 이거 이제 보니, 신지가 근처에 있어서 그런 건가?”

 “돌아가.”

 “하핫, 여전히 불친절하네.”

―마뉴라!

 신지의 몬스터볼이 멋대로 열리고, 그 안에 몸을 숨기고 있던 마뉴라가 다시 한번 모습을 나타냈다. 마뉴라는 붉은 두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날카로운 손톱을 과시하는 몸짓은 명백히 눈앞의 트레이너와 포켓몬에 대한 위협 내지는 도발이었다.

 “마뉴라, 네게 나오라고 명령한 적은 없을 텐데.”

 소년의 딱딱한 말에, 마뉴라는 입꼬리를 올렸다. ‘나는 네가 원하는 게 뭔지 알아’, 그런 뜻이라는 것을 신지는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네 마뉴라, 배틀하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신지.”

 “지금은 흥미 없어.”

 신지가 다시 한번 몬스터볼의 개폐 스위치를 눌렀다. 마뉴라는 특별히 저항하지 않고 서늘한 웃음을 지은 채 몬스터볼로 되돌아갔다.

 신지는 바위에서 일어섰다. 가볍게 착지해, 사토시를 지나쳐 걸었다. ‘어이, 신지’ 하고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머릿속에서 윙윙대는 더 큰 소리에 묻혔다.

「맞아, 사토시 군이 왔어. 그 볼텍커를 쓰는 피카츄 트레이너. 그 애는 재밌네. 마음에 들었어.」

달라져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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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03

 

 

봄이 왔다.

 

기분이 나쁘다.

 

효우타는 나무에 매달린 벚꽃을 보며 생각했다. 작은 분홍색 꽃 중 대부분은 아직 덜 피어난 모습이다. 저 꽃들은 이윽고 활짝 피어나고 비처럼 후두둑 떨어질 것이다. 아름답다고 깨달은 순간에는 이미 남아있지도 않을 것이다. 살아있다는 것은 죽어간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나타네가 들으면 너는 참 이상한 생각을 한다고 깔깔 웃을 생각이었다.

그 모습을 상상하자 효우타는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효우타는 나뭇가지에 손을 뻗어, 가는 꽃줄기를 잡았다. 아직 싱싱한 꽃이었다. 벚꽃을 꺾어, 주머니에 넣었다.

 


 

봄이 완연한 쿠로가네시티는, 지하에 있는 탄갱까지도 에너지로 가득한 것 같았다.

그렇지만 효우타를 반기는 작업원 일동의 웃음은 언제나 따뜻했기에, 효우타는 겨울의 추위에 불평한 적이 없었다.

 

 “좋아요, 오늘도 힘내봅시다!”

 “오우!”

 

매일 작업은 단순했다. 망치로 벽의 가장 겉면을 부수고, 무언가를 발견하면 곡괭이로 조심히 꺼낸다. 웬만해서는 자질구레한 보석이나 조각 따위가 나왔지만, 가끔 화석을 캐낼 수 있었다. 팀의 주요 목적은 그 화석을 캐내는 데에 있었다. 단순한 작업이었기에, 리더라고는 해도 효우타의 작업 방식도 다른 동료들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장갑을 낀 손으로 벽을 더듬으면 어떤 에너지가 전해져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에너지의 원천을 찾아내듯이 더듬다 보면 무언가가 묻혀있는 위치를 특정해낼 수 있었다.

 

'벽에 손을 대면, 어딘가에 묻혀있는 화석이 말을 걸어올 거야. 나는 여기에 있어, 라고.'

'하하, 그것참 추상적인 조언이네요, 리더.'

'아하하, 그런가?'

 

아마 실제로는 조금 더 논리적인 요령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탄갱에서 긴 나날을 일한 효우타는 머리가 아닌 몸의 감각으로 화석을 찾는 법을 익히고 있었다.

 

벽을 더듬던 효우타가 멈추어 서 망치를 꺼냈다. 팔에 반동이 오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벽을 두드려서 겉의 벽을 깨자 어떤 물체의 끄트머리가 나타났다. 아마 조각 같았다. 곡괭이로 벽 표면을 조금 더 걷어내 주자, 예상대로 파란 조각이 모습을 나타냈다. 굳이 조각을 캐내느라 벽의 안정성을 떨어트리고 싶지 않다고 판단한 효우타는 캐던 곳을 버리고 근처의 벽을 더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화석이다.

그렇게 생각했고, 캐내자 역시나 화석이었다. 효우타는 작은 화석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고개를 돌려가며 다양한 각도에서 뜯어보았다.

화석임에도 유려한 곡선, 그리고 가늘어지는 모양새―뿌리화석이었다.

박물관에서 복원이 가능한 종류 중 하나이다.

 


 

탄갱 박물관으로 향하는 효우타는 늘 같은 고민을 했다―

'화석을 되살리는 게 괜찮은 걸까?'

 

207번도로의 벚나무에서 떨어진 꽃잎이 쿠로가네시티의 북부까지 날려오고 있었다. 효우타는 초봄의 자신이 꽃을 보며 살아있는 것을 폄하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렇지만 화석을 복원시키는 일이 어쩌면 화석의 존엄을 훼손하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것 따위, 처음 즈가이도스를 부활시킬 때부터 깨닫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오늘날까지 후회는 하지 않았다. 결정에 있어서 두개의화석의 동의 따위 없었지만, 그럼에도 즈가이도스가 부활한 그 날부터 오늘까지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유대감을 쌓아왔기 때문이었다.

복원된 화석 포켓몬이 누군가를 만나서 행복해질 수 있다면.

그러기 위해서 화석이 인간의 곁으로 찾아오는 것이라고 한다면.

 


 

효우타는 신오우의 시공 신화에 관하여 몇백 페이지가 빼곡히 적혀있는 두꺼운 책을 책꽂이에서 꺼냈다.

책장을 적당히 넘기자, 페이지 사이에 끼워둔 작은 꽃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바짝 눌린 채 말라버린 꽃은 색은 조금 바랬어도 초봄에 본 어여쁜 모양새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효우타는 꽃이 바스러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주웠다.

 

"이 녀석의 화석을 보자마자 나타네 네가 생각나서, 복원시켜버렸어."

효우타가 나타네에게 몬스터볼을 내밀었다.

나타네가 고개를 갸웃, 하며―머리카락이 같이 찰랑, 흔들렸다―효우타로부터 몬스터볼을 건네어 받았다.

"풀 포켓몬?"

"꺼내봐."

"좋아, 나와봐!"

나타네가 역동적인 자세로 몬스터볼을 던지자, 붉은 빛에 감싸여서 포켓몬이 모습을 드러냈다.

포켓몬을 확인한 나타네는 환해진 눈빛으로, 달려들어 새 동료를 껴안았다.

"꺄아, 리리라다!"

갑자기 껴안아진 리리라는 약간 당황한 듯, 약간 부끄러운 듯, 그러나 싫지는 않은 듯 촉수를 꼼지락거렸다. 옷 너머로 닿아오는 바다나리 포켓몬의 서늘한 체온이, 나타네는 썩 사랑스러웠다.

"약간 미끌미끌해! 게다가 이 윤기 흐르는 피부! 그리고 딱 시원한 온도! 이 리리라, 무척 건강한 아이 같아! 너무 좋아!"

행복해하는 나타네의 모습에, 효우타도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리리라도 새 트레이너를 만나게 되어 기쁜 듯했다.

"고마워, 효우타, 소중하게 키울게!"

리리라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반쯤 파묻은 채 나타네가 생긋 웃었다.

뿌듯해하며 효우타가 무심코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자, 선물하려고 가져온 압화가 손끝에서 부서지는 감각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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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31

 

 

 호쿠라니 천문대는 유동인구가 적다. 마마네가 캡틴이 되어 천문대에서 시련을 운영하기 시작한 이후로는 순례자들이 종종 찾아오기 시작했지만 알로라의 섬 순례자라는 것도 원래부터 많은 수는 아니었다. 더구나 호쿠라니산은 너무 높은 곳에 있었다. 계절의 변화조차 크게 느껴지지 않는 천문대에서 멀레인은 은신하듯 조용히 숨을 쉬며 살아가고 있었다. 검은 하늘에 박제된 듯 움직이지 않는 별들. 그 멈춘 시간 속에서, 기억은 닫아둔 채로.

 좋은 기억만 있었다. 그 사실이 멀레인을 괴롭게 했다. 추억의 온도는 따뜻했고, 환하게 비추는 동료가 있었다. 꼭 하우올리의 바다 같다. 둘이서 걸으면 발자국도 두 쌍씩 찍히던 모래사장. 서로로부터 몇 걸음 떨어져서 배틀을 했었다. 모래라는 환경이 강철 타입 트레이너인 멀레인에게 유리했지만 내리쬐는 해가 불꽃의 힘을 강하게 했다. 아슬아슬하게 졌던 것 같다. 그래도 행복했다. 따갑도록 눈부셨던 태양, 그리고 너.

 강철에는 녹는점이 있다. 그래서 멀레인은 닫아야만 했다. 공간을 연구하는 버넷은 아름다운 여자였다. 무중력공간 같은 기억 속에서 추억의 파편이 떠다닌다. 사실 멀레인은 PC 관리자 같은 일은 버넷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 믿었다. 처음 포켓몬 PC 시스템을 접했을 때는 시스템을 공부하느라 그녀와 함께 며칠밤을 꼬박 지새웠다. 피로한 밤에도 빛나는 은화 같았던 눈, 종소리처럼 맑았던 웃음소리. 그것은 그를 닮아있었다. 그래서 공간연구소에 초대받았을 때, 멀레인은 답장을 할 수 없었다. 차라리 사람에게서 떨어져 별에 가까워지는 것을 택했다.

 호쿠라니큰산은 공기가 맑고 하늘이 가까워 별이 밝았다. 멀레인은 유래 없이 건강했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 녹을 일도 없겠지. 기억에 자물쇠를 걸면 강철처럼 단단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행복하지 않지만 평온해. 하지만 아고지무시에게 먹이를 줄 때 본 석양이 너처럼 장엄하고 따스해서 네가 보고 싶었어. 너를 비추는 항성이 되고 싶다. 너는 비추어지는 줄도 모르겠지. 녹은 강철도 다시 굳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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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01

 

 

멀레인은 혼란스럽게 눈앞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시로데스나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노란 눈은 번뜩이며 강렬한 눈빛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으며, 새카만 입은 꿀렁거리며 모양을 바꾸고 있었다. 시로데스나의 표정은 읽기 어려웠지만, 본능적으로 멀레인은 자신이 좋지 않은 상황에 처해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알 수 없는 것은 어째서 이런 상황에 처한 것인지였다. 분명 자신은 언제나와 같이 천문대에서 하루분의 일을 마치고 마마네와 게임을 하다가 잠들었을 터……

 갑자기 입을 크게 벌린 시로데스나가 멀레인을 집어삼킴에 따라 동시에 멀레인의 생각이 끊겼다. 눈앞이 깜깜해진 멀레인은 반사적으로 팔을 휘둘렀다. 몸부림치자, 더 많은 양의 모래가 얼굴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질식사라도 시키려는 듯, 한알 한알에 의지가 있다고 알려진 모래가 안경 속으로, 입안으로 들어왔다. 모래가 묻은 손으로 눈을 비벼보아도 나아지지 않았고, 기침을 해도 숨을 들이켜려 하자 코와 입안으로 다시 모래가 들어찼다. 멀레인은 의식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필사적으로 사지를 휘두르며 상체를 뻗자, 멀레인은 겨우 시로데스나의 몸통 밖으로 고개를 뺄 수 있었다.

 멀레인은 급하게 숨을 골랐다. 콧속에 남아있던 모래도 같이 몸 안으로 넘어왔지만 그런 사소한 불편은 상관도 없을 정도로, 신선한 해안의 공기가 폐부에 들어차는 감각은 감격적이었다.

 호흡에 집중하던 멀레인의 집중을 돌린 것은, 아직 시로데스나의 체내에서 벗어나지 못한 몸에 들어오기 시작한 모래였다. 모래는 갑자기 멀레인의 옷 속으로 폭포처럼 급하게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소매를 통해 셔츠 안으로, 바지의 남는 통 속으로. 조금 축축하면서도 까끌까끌한 모래가 멀레인의 맨피부에 밀착했다. 집요한 움직임으로, 습한 모래가 신체를 덮어왔다. 시로데스나는 먹잇감이 약해진 틈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다시 멀레인의 머리를 삼켰다. 모래가 호흡기를 채웠고, 의사와는 관계가 없는 성적 쾌감과 함께 호흡곤란이 멀레인의 시야와 의식을 흐렸다.

 

 멀레인이 눈을 떴다.

 꿈의 여파로 거칠게 호흡하며, 시야를 가린 물건을 자유로운 팔로 떼어냈다.

 떼어낸 물건을 보자, 안경을 쓰지 않은 저시력의 눈으로는 흐릿하게 보이기는 했지만, 눈 위에 씌우는 방식으로 장착할 수 있게 되어있는 가상현실 계열의 장치로 보이는 기기임을 판단할 수 있었다.

 "……."

 멀레인은 우선 기계를 적당히 내려놓고, 소파의 팔받침에 올려둔 안경을 집었다.

 안경을 쓰자 시야가 한층 맑아지며, 정신도 들었다.

 마마네가 지켜보고 있었다.

 "……마-군?"

 "마-상, 괜찮아?"

 "……조금 악몽을 꿨을 뿐이야. 괜찮아." 미약하게 웃었다.

 마마네는 웃지 않았다.

 잠들어있는 동안 꼴사나운 모습이라도 보인 탓에 사촌이 안심하지 못하는 것으로 판단한 멀레인은 좀 더 힘을 줘서 미소지었다.

 "정말로 괜찮으니까, 마-군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정말?"

 "응, 정말이야. 자, 약속."

 멀레인이 새끼손가락을 내밀자, 마마네는 쭈뼛거리며 약속을 받아들였다. 새끼손가락을 꼬옥 걸고 두 번 손을 흔들었다.

 "그런데," 멀레인이 아까 내려두었던 기계를 꺼내어 들며 물었다.

 "마-군, 이건 뭐니?"

 마마네가 씌운 것을 상정하고 말하는 투였기에, 마마네는 발뺌할 타이밍을 잃었다.

 "……내가 개발한 새 머신이야."

 마마네는 차라리 웃었다.

 "이번엔 어떤 머신?"

 멀레인은 아플 만큼 기대를 담은 순진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잇슈지방의 마코모 박사가 개발한 포켓몬 드림 월드를 모티브로 만들어봤어. 좀 더 가볍게…… 요약해서 말하자면, 그, 꿈을 조종…… 하는…… 세부조정, 은 무리지만, 그……"

 "꿈을 조종하는?"

 마마네는 한계에 달했다. 멀레인이 옳은 결론에 도달할 것이라는 사실은 틀림없었지만, 추리 과정이 고통스럽게 길어지고 있었다. 그 시간을 버텨내는 고문을 버텨낼 수 없었기에, 마마네는 빠르게 자백하는 길을 택했다.

 "……마-상, 꿈은 어땠어?"

 "응, 내 꿈?"

 멀레인이 머뭇거리기에, 마마네는 그의 고민을 덜어주기로 했다.

 "내용은, ……알고 있으니까."

 멀레인의 표정이 흔들렸다. 마마네는 시선을 피했다. 바닥을 보며, 마마네는 내뱉듯 재촉했다.

 "어땠어."

 "……."

 멀레인이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왜 그랬니."

 말은 사형 선고처럼 떨어졌다.

 "……모르겠어."

 "……."

 침묵이 이어졌고, 마마네의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모르겠어, 난. 들키지, 않을, 리도, 없는데."

 마마네가 눈을 가렸다.

 "나, 갑자기……. 그런데, 한 번, 씌우면, 잠이 깨기 전에 장치를 제거하는 건, 위험, 할지도 모르니까……"

 마마네가 팔에 파묻은 머리를 가로저었다.

 "마-상은, 나한테, 소중한데, 소중한데……"

 훌쩍이기를 계속하자, 멀레인이 다가와 얇은 팔로 끌어안아 왔다.

 마마네는 그 품속에 몸을 맡겼다. 멀레인의 감촉이 몸을 감싸왔다. 그것이 마마네를 두렵게 했지만, 마마네는 끝내 벗어나지 않았다. 멀레인 앞에서 마마네는 한없이 더 작아졌다. 마마네는 작아져서 사라지기 전에 욕망을 벗는 기계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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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10

 

 

 가슴이 까맣게 타들어 가는 듯한 낯선 감각이었다.

 책을 못 읽게 되었다. 읽는 법을 잊어버렸다.

 새 학기를 앞둔 봄에 체렌은 교사를 그만두었다. 다음 학년 교과서를 읽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체렌은 3학년의 나이에

 그를

 만나서.

 

 처음 만났을 땐 이름도 없는 사람이었다. 한참을 그랬다. 그는 ‘N’이었다. 그로부터 계절이 여섯 번 변했을 때 ‘N’의 의미를 물었다. Natural Number. 그가 말했다. 자연수. 자연수의 N.

 끝내 이름을 묻지 못했다. ‘네추럴 하르모니아 그로피우스.’ 네 입으로 말하는 게 듣고 싶었어.

 

 처음 사라졌을 때는 별 감흥이 없었던 것 같다. 몇 번 얼굴을 마주쳤고 몇 마디 주고받았다 (주고받았다고 하기엔 서로 자기 할 말만 던지긴 했다). 그뿐이었으니까. 토우코는 울었다. 체렌은 그게 분했던 것 같다. 2년 후 그를 다시 만났다. 그가 또 사라졌을 때, 체렌도 울었다. 사무치도록 외로웠다. 아무도 없다는 기분이 들었다. 처음 만나는 기분이었다. 아주 아팠고, 그리고 마음에 꼭 들었다. 마치 줄곧 그렇게 살아온 것처럼 고독은 체렌에게 잘 어울렸다.

 

 토우코, N이랑 만났대. 지금은 같이 여행하고 있대. 벨은 생긋 웃었다. 다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아니 다들 아무렇지도 않았다. 세 사람만의 유대도 N도 사라졌는데 다들 아무렇지도 않았다. 체렌은 이것이 아주 낯설었다. 그러고 보면 항상 사람에게 가장 예민했던 건 자신이었다.

 

 그리고 또 아무렇지도 않게 마주치고. 마지막으로 그를 만났을 때 그는 토우코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라이몬의 인파 사이에 섞여 있었다. 그 후로는 그를 만나지 않았다.

 

 배신은 천천히 심장을 좀먹어갔다. 첫날은 아팠다.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새로운 통증이었다.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을 때 즈음 실은 거의 죽었다는 걸 깨달았다. 책을 읽을 수 없었을 때 깨달았다.

 

 체렌은 읽을 수 없는 책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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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12

트리거 워닝: 자살


 

광휘 군은 빛나 양과 절친하다고 들었는데, 빛나 양에 대해서 한 말씀 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그녀는 구 년 전 첫 포켓몬을 받고 여행을 떠났어요. 그녀가 팽도리를 골랐던 그 순간에 나는 바로 옆에서 그걸 보고 있었죠. 그녀만큼 총명한 팽도리였고 그녀도 그녀에게 포켓몬 도감을 건네었던 마박사도 옆에서 지켜보던 나도 희망에 가득 차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성공하고 우리는 행복할 거라고 그리 믿어 의심치 않았지요.

 

 여행은 아주 멋졌어요. 우리가 열 살이 될 때까지 시간을 썩히느라 읽어왔던 소설들과 보아왔던 영화들 그 어느 것도 그녀의 여행만큼 스펙타클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녀는 빠르게 성장했고 모든 배지를 따기는 물론 콘테스트를 제패하거나 갤럭시단이라고 이름 붙여진 해괴한 악의 집단을 물리치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실은 열 살짜리 소년소녀에게 맡기기에는 너무나도 무겁고 참혹한 임무였지만 그녀도 포켓몬도 강했습니다 신오지방의 그 누구보다도 강했습니다. 오지랖이 넓은 그녀의 꽃향기마을에서의 (그녀는 그곳에서 일생의 파트너가 될 꼬몽울을 잡기도 했습니다) 사사로운 참견은 그녀와 갤럭시단의 싸움으로 번졌고 결국 천관산 정상에서 그녀는 시간의 신과 손을 잡고 악의 보스를 물리쳐 세상을 구했습니다. 그렇게 그녀는 세상을 구한 히어로가 되었고 그 이후로 금방 여덟 번째 배지를 손에 넣고 사천왕, 그리고 챔피언도 넘어선 그녀는 지구의 은인, 그리고 신오지방의 챔피언이 되었습니다. 행운이 꽃피고 우리는 실로 행복했습니다. 그런 과분한 것은 달라고 한 적도 없건마는, 우리에게 한순간에 그렇게 많은 것을 주었던 신은 또 한순간에 모든 것을 되 앗아갔습니다.

 

 그녀는 화려하게 여행하고 화려하게 배틀하다가 종종 오박사로부터 받은 포케트레를 만지작거리며 휴식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녀의 명성은 차츰 잦아들었고 포케트레를 들고 풀숲을 거니는 그녀에게 말을 걸고 사인을 부탁하는 사람도 점점 줄어들었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관심도 여유도 즐길 줄 아는 유연하고 튼튼한 아이였죠. 그녀는 배틀을 하고 포핀을 만들고 드레스를 입고 포케트레를 돌리고 포켓몬을 만나고 쓰다듬고 안고 키스하고 사랑할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행복했습니다. 서로 지극히 사랑하는 엠페르트와 로즈레이드가 모든 낮과 모든 밤에 그녀를 지켰고 사람을 생각하면 고향에 어머니가, 배틀타워 앞에서 반겨주는 용식이가, (부끄러워서 안 그런 체하기는 했지만) 항상 기다리고 있는 내가 있었습니다. 일상의 행복을 잊지 않는 빛나는 평생 행복할 자격이 있는 아이였습니다.

 

 누가 감히 신오 챔피언, 세계의 구세주인 그녀를 건드렸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지금까지도 밝혀지지 않은 미제 사건이라는 건 당신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그녀를 제물로 PC 박스 보관 시스템의 취약점이 처음으로 세간의 주목을 끌어모으게 되지요. 이수진은 말합니다. ‘데이터 손실’. 그렇게 그녀는 삼 년간 자기 자신보다도 그리고 세상의 무엇보다도 사랑했던 두 마리의 포켓몬을 비롯하여 열아홉 마리의 포켓몬을 유실합니다. 개중에는 그녀가 아끼던 천공의 신 레쿠쟈나 초록색 동미러, 은색 배루키와 같은 귀한 포켓몬도 있었지만 그녀가 가장 가슴 아파한 소실은 엠페르트와 로즈레이드 두 마리였습니다. 공허한 그녀의 박스에 출처를 알 수 없는 브케인만이 몇 마리 나뒹굴고 있었지요.

 

 그녀의 행복은 거기서 끝났습니다. 그녀는 본래 매사에 긍정적이어서 궁지에 몰려도 미소를 잃지 않았지만 그 사건은 그녀를 너무나도 철저히 부러뜨렸습니다. 그녀는 마음을 잃어버려 더는 일말의 행복도 느끼지 못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던 그녀는, 가엾은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신의 축복도 닿지 않을 만큼 철저한 나락으로 추락하고 말았습니다.그녀는 여행자에서 방랑자가 되었습니다. 더는 고향에 돌아오지 않습니다. 숨 쉬는 것이 부끄러워 어찌 어머니를 만나겠느냐고 합니다. 그녀가 부끄러울 일은 단 한 가지도 없는 데 말입니다. 포켓몬을 떠나 인간에게로 돌아오지를 못합니다. 그녀는 더 이상 배틀도 하지 않고 포핀도 만들지 않고 드레스를 입지도 포켓몬을 만나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PC 보관 시스템이라는 이름의 판도라의 상자 그 밑바닥에도 희망은 남아있었습니다. 아직 따뜻한 알 네 개. 그녀는 가슴에 그것들을 하나씩 품고 자전거로 달렸습니다. 그리고 파릇파릇한 녹색의 로젤리아가 네 마리 태어난 것입니다. 로젤리아는 울음소리가 웃음소리인 포켓몬입니다. 그것들이 태어나면서 꺄르르 웃던 소리를, 그걸 듣고 빛나는 일련의 사건 이후 처음으로 웃었습니다. 그리고 울었습니다. 하지만 웃었습니다.

 그녀는 여전히 배틀도 하지 않고 드레스를 입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울지도 웃지도 않던 그녀의 얼굴에 표정이 서서히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에는 로젤리아에게 먹일 포핀을 만드는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또 얼마 후에는 포케트레를 켜고 로젤리아와 함께 풀숲을 거니는 모습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전히 잘 웃는 사람은 아니게 되어버렸지만 로젤리아가 포핀을 먹고 기뻐할 때나 특별한 색의 포켓몬과 조우할 때 가끔 환하게 웃어요. 포핀은 먹여놓고 콘테스트는 나가지 않지만.그녀가 웃으니까 뭐 어때요. 아무래도 좋은 일이지. 갈색 찌르꼬를 안고 활짝 웃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어 무엇보다도 다행인겁니다. , 또 로젤리아 한 마리는 칼로스지방의 재능 넘치는 신참 트레이너에게 맡겼는데, 최근 뉴스에서 그 애가 로즈레이드를 데리고 포켓몬 월드 챔피언십에서 준우승했다는 소식이 들렸지요. 그걸 듣고 빛나가 또 웃었어요. 환하게. 그래서 나도 다시 행복하기 시작할 것 같았는데…….

 

 별안간 죽어버렸어요. 천관산에서 뛰어내려버렸어. 하하, 다른 지방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관동 챔피언 레드도 은빛산에서 뛰어내렸다고 했던가? 똑같이 돼버렸어…….

 

 

 

포켓몬의 권위자 마박사 님의 조수이자 손자인 광휘(19)군이30일 새벽 202번도로 부근에서 사망한 채 발견되었습니다. 포켓몬에 의한 자살로……

 

 

용식은 TV를 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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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527

 

 

 안녕, 난 미미야.

 미미는 아직도 자신을 그렇게 소개했다. 미미라는 이름을 붙인 소녀는 진작에 미미를 버리고 사라졌다. 미미는 소녀도 이름도 저주했지만 별달리 새 이름을 지어주는 이도 없었기에 계속 자신을 미미로 소개했다. 미미의 좌우명은 복수와 불신이다.

 

 깜까미는 자신의 이름은 커녕 언제부터 자신이 그 동굴에서 보석을 파먹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언제부터 두 눈마저 보석이 되어버렸는지 모른다. 그는 트라우마도 추억도 없다. 그래서 그는 문득 동굴에서 나가보기로 했다. 언제부터 동굴에서 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전에 나간 적이 있었던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렇게 온 호연을 어슬렁거리던 깜까미는 우연히 송화산에서 미미를 만난 것이다. 미미는 아주 예뻤다. 깜까미에게 있어 아름다움이란 곧 보석을 뜻했다. 미미는 보석이 아니다. 그런데 아름답다. 그런데 보석이 아니다. 깜까미는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미미의 빨간 플라스틱 눈알이 보석으로 보였다.

 아름다운 것은 보석이어야만 하므로.

 

 미미에게 보석은 전혀 다른 것을 뜻한다. 미미는 인간의 탐욕을 잘 안다. 그리고 그것을 몹시나 혐오한다. 모든 인간들은 궁극적으로 보석을 탐한다. 인형을 팔면 돈이 되니까 인형을 만들고 되팔 가치도 없는 인형은 갖다 버릴 뿐이다. 그들은 미미를 질뻐기가 우글거리는 쓰레기장에 집어던지고 아무렇지도 않게 발길을 돌렸다. 미미는 너무 낡아서 팔아도 돈이 안 나올거야.

 

 천 원 가치도 남아있지 않은 미미에게 깜까미는 사랑한다고 말했다. 화려하게 말할 줄 모르는 깜까미의 아주 간결한 고백이었지만 그것은 진심이었고 미미도 그를 믿었다. 오른쪽 눈을 파이기 전까지는.

 

미안해, 난 네 눈이 보석인 줄로만 알았어.

 

 팔짱을 끼고 그르렁거리는 미미의 발치에서 깜까미가 싹싹 빌었다. 미안해, 미안해. 미안함을 표현할 방법조차 몰라서 미안해를 그저 반복했지만 미미의 마음은 약간도 동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 눈에 손 댔어?

미안해, 진짜 미안해. 다시는 안 그럴게.

내 눈을 노리고 지금껏 추태 부렸다는 거지?

 

 미미가 남은 눈을 쿡쿡 찔러대며 깜까미를 몰아붙였다. 싸구려 플라스틱 소재였다. 보석에서 눈물이 흐를 수 있었다면 깜까미는 펑펑 울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거 아니야! 제발 믿어줘!

그런 거 아니면? 그런 거 아니면 뭔데?

네 눈을 보는데, 그게 갑자기 너무 보석 같은 거야. 너무 반짝반짝하고, 너무 예뻐서 그래서 그만 한 순간 보석이라고 착각해서 그런데 보석이라고 생각하니까 통제가 안 되는 거야…… 나는 보석을 먹고 사니까…….

그걸 변명이라고 하니?

 

 

 미미가 홱 돌아섰다. , 잠깐만, 가지 마. 울먹거리며 깜까미는 처절하게 팔을 뻗었지만 미미는 성큼성큼 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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